2001년 1월 7일, 삼상 2:1-11, 한나의 신앙 2001-08-20 00:49:49 read : 11114
본문2:1-10 까지 한나의 신앙고백으로서 나는 이렇게 신앙 생활을 하겠습니다. 라는 한
나의 신앙 생활의 선언입니다.
신년을 맞이하여 한나의 신앙 고백이 여러분의 신앙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
로마가 세계를 지배하던 당시, 세계의 어머니를 대표할 수 있는 두 여인이 있었다.
한 사람은 유명한 참회록을 후세에 남긴 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나카'이고,
다른 한 사람은 네로 황제의 어머니 '아그리피나'이다.
아그리피나는 그녀의 남편이었던 클라우디오 황제의 우유부단한 성격을 악이용한 대표적
인 아내였다. 그녀는 아들인 '네로'를 조속히 왕위에 오르게 하기 위해 남편인 클라우디
오 황제를 암살시키고, 그가 원하던 대로 네로를 즉위시켰다. 그러나 결국 그녀는 자식인
네로에게 살해당하고 말았다. 세상 사람들은 이것을 가리켜 '사필귀정'이라고 말하고 있
다. 그런가 하면 모나카는 한 어머니로서 눈물의 기도 속에서 우상을 숭배하며 방탕하던
자식 어거스틴이 성 어거스틴이 되어 새로 태어난 것이다.
한 여인으로서의 어머니는 약한 존재이며 울고 웃는 평범한 여인이다.
그러나 한 어머니가 자식에게 끼치는 영향력은 결코 평범하지 않고 절대적인 것입니다.
훌륭한 인물의 배후에는 항상 위대한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어머니의 배후에는 반드시 위대한 신앙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위대한 신앙의 뒤에는 반드시 신실한 어머니의 기도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자녀를 위한 어머니의 기도는 하늘 은행에 자식 앞으로 적금을 드는 것입니다.
기도는 저축입니다. 기도를 쌓아두면 반드시 자식이 나중에 이자를 붙여서 찾아 쓰게 됩
니다.
기도를 저축한 사람은 반드시 나중에 무슨 일이든지 쉽게 풀려지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
입니다.
기독교는 기도를 빼고서는 말할 수가 없는 것으로 그래서 기독교를 기도교로 블룰정도
입니다.
오늘 특별히 한나의 신앙은 "기도하는 어머니"였다는 것입니다.
현대 사회가 아무리 발달하고 급변한다 해도 동서양을 막론하고 가정이라는 보금자리를
중심해서 사회는 성장하고 활동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은 가정을 떠나서는 살 수가 없습니다.
이처럼 한 사회의 기본 단위가 가정이라면, 한 가정의 심장부는 어머니입니다.
어머니가 건전하고 성스러울 때 그 가정과 사회는 밝고 신선하고 아름다울 것이다.
그러므로 사회에서 어머니의 역할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훌륭한 맥아더 장군은 얼마나 많은 훈장을 받았습니까?
미국 버지니아 해안에가 맥아더 기념관에는 그가 평생받았던 많은 훈장들이 진열되어있
는데 그는 훈장들 옆에 자서전에 이렇게 썻습니다.
"나는 수많은 훈장을 받았지만 내 생애 가장 영광스런 훈장은 하나님께서 내게 자녀를
주신 것이다. 내게 가장 영광스러운 훈장은 자녀다."
여러분 자식은 하나님의 상급입니다.
당신의 자녀들을 볼 때마다 하나님의 선물로 보고 그 선물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
니다.
그리고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니 하나님 뜻대로 잘 길러서 하나님 앞에서 자랑스럽게
보고할수 있는 부모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자녀애 대하여 청지기 정신을 가져야 합니다.
청지기 - 내 것 아니라는 것이지요. 아이의 주인이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자녀를 이 땅에 보내 주시고 아이의 미래를 영원히 알고 계시는 하나님이 주인이라는 것
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맡아서 기를 뿐입니다. 내 소유물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아이를 향한 하나님의 분명한 비젼을 깨닫고 그 비젼을 잘 이루어 가도록 도와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소유의식을 가진 사람은 그렇게 기를 수가 없으며 아이의 개성을 무시합니다.
자식은 하나님의 선물임을 깨닫고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이 이 자녀에게 이루
어지게 하시옵소서. 라는 한나의 기도가 나와야 합니다.
역사는 위대한 인물들에 의해 좌우되고 있지만
사회는 어머니의 성품에 따라서 그 사회의 모습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에 위대한 선지자 사무엘이 탄생될 수 있었던 것은 그에게 위대한 어머니 한나
가 있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주제는 한나가 어떻한 신앙이었기에 하나님의 은혜로 복된 삶을 누릴수 잇
었고 위대한 선지자 사무엘을 낳을수가 있었는가 한나의 신앙을 본받고자 합니다.
주전 11세기 경, 에브라임 산지에 엘가나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한나와 브닌나라는 두 아내가 있었습니다.
한나에게서 아이가 없자 엘가나는 두 번째 부인 부닌나를 통하여 자식을 보게 됩니다.
성경은 일부일처를 지키라고 했는데 엘가나는 하나님이 정해주신 법을 어김으로서 가정
에는 복잡한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브닌나는 아이를 낳자 기고만장해 졌습니다. 한나를 멸시하고 조롱했습니다.
한나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 몸부림하며 울며 기도했습니다.
"나는 어쩌다 남들 다 낳는 아이 하나 를 낳지 못하여 이런 천덕 꾸러기가 되어야 한단
말인니까 내게 아이를 주시면 훌륭하게 키워서 하나님께 드릴 것인데..
식음을 전폐하고 누워있는 아내에게 1장 8절에 보면 남편이 찾아와 위로하지만 그녀의
슬픔을 해결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슬픔도 지나치면 죄가 됩니다.
믿는 사람들은 잠시 슬픈 모습은 보일지라도 오래동안 슬픔 가운데 있는 것은 성경적이
지 않으며 하나님을 근심케 하는 죄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모습을 보이는 자녀를 통해 전혀 영광을 받으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욕망을 조절하려고 노력하는 만큼 슬픔도 조절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면 한나는 어떻게 자신의 슬픔을 해결하였는가? 본받기 바랍니다.
첫 번째 한나는 하나님 중심의 삶이었습니다.
17세기에 갈릴레이가 지구가 둥글다는 원리와 함께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돈다는 지동
설을 주장했습니다.
갈릴레이가 '"지구 중심적 사고'를 '태양중심적 사고'로 변환시킨것 처럼
지금까지 나 중심의 신앙에서 주님 중심의 삶으로 변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내 삶에 중심으로 하여서 '그리스도 중심적 사고'로 인생의 구조조정이
될 때 우리의 삶에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모든 것에 판단에 기준이 예수 그리스도요 모든 가치관의 기준이 예수 그리스도요
모든 성공과 출세의 목표가 예수 그리스도요 네 행복과 기쁨의 이유가 예수 그리스도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한나는 자신의 슬픔을 여호와 하나님 앞으로 갖고 나옴으로서 해결을 본 것입니다.
시편 37편 4절에 말씀입니다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
한 한 한나는 이러한 슬픈 문제를 승화시켜 문제를 하나님 앞에 갖고 나와 하나님께 매달리는
기도를 통하여 이스라엘의 위대한 지도자 사무엘이 태어나는 축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많은 위대한 역사는 고통과 문제를 통해서 탄생되는 것입니다.
한나는 받은 은혜를 뛰어 넘어 그 은혜를 주신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그저 선물에 집착하여 선물을 주시는 분이 어떤 분인지를 잊어버
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물'에 집착하지 말고 '선물을 주시는 하나님'에게 관심을 쏟는 것이 선물을
받는 지름길입니다.
한나는 하나님에게 문제해결의 열쇠를 맡겼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문제를 푸는 열쇠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현재 부딪치는 어려운 문제의 문을 여는 능력을 제공하지 않는다면 우리
는 믿음을 다시 한 번 점검해야 합니다.
우리는 천국만 가려고 믿음을 가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문제 해결
의 열쇠를 찾아서 활용하는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믿음을 가졌으면 문제를 극복하고 해결하는 능력도 커져야 합니다.
가장 약점이라고 생각한 것이 오히려 장점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역사의 주관자이십니다
하나님께서 한 개인의 성장 및 활동 그리고 죽음까지 그 모든 과정을 주관하시고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한 개인의 역사를 주관하시기도 하지만
인생 성공의 비결 역시 하나님의 주관하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우리 인생에 성공과 실패의 키로 삼아야 합니다.
현재 재산이 얼마나 많으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자신의 인생의 흥왕 성패의 키로 삼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렇게 살기 위해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내 삶에 중심으로 모시고 삶의 패턴 모양을
바구어야 합니다.
2)두 번째 한나는 슬픔의 눈물을 기도의 눈물로 승화시켰습니다.
사무엘을 낳기까지 한나의 눈물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이 흘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눈물은 다 똑같은 것이 아닙니다.
기뻐서 흘리는 눈물도 있고 감격에 겨워 흘리는 눈물도 있고 사랑하는 연인을 보고 싶어
서 애끓는 마음에 흘리는 눈물도 있고 슬픔에 흘리는 눈물도 있는 것입니다.
한나의 눈물도 하나가 아닙니다.
한나가 첫 번째 흘린 눈물은 1장 8절에 보면 아들을 낫지 못했기 때문에 설움을 받아서
생긴 탄식의 눈물이었습니다.
엘가나는 한나의 눈물을 보고 그녀를 더욱 사랑하고 위로하였으며 그래서 1년에 한번씩
실로에 가서 제사를 드릴 때에 특별히 한나에게는 희생제물을 다른 사람들보다 갑절이나
주었습니다(1:5)
그러나 그것이 오히려 부닌나로 하여금 시새움을 일으켜서 부닌나의 모욕과 수모는 더욱
신랄하엿습니다.
"애도 못낳는 주제에 무슨 갑절로 제물을 드린담" 하고 비웃엇을 것입니다.
그 말에 한나는 더욱 그 마음에 격동이 일어나서 금식하며 탄식의 눈물을 흘렷습니다.
여러분 다른 사람의 약점 열등감을 건드리려서는 안됩니다.
뚱뚱하다고 느끼는 여자에게 '뚱보'라고 놀려서는 안될것이며 공부 못하는 사람에게 '공
부도 못하는 주제에'라는 소리를 해서도 역시 안됩니다.
말하는 사람은 무심결에 장난삼아 하는 말이지만 듣는 당사자에게는 마음에 커더란 상처
가 되어서 사람이 정상적이 못하고 열등감에 빠지고 쉽게 상처를 받는 성품이 되어서 때
로 갑자기 공격적이 되고 불안한 정서를 보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무리 식구간이라도 상대방의 컴플렉스가 무엇인지 세밀하게 관찰하여 그것을
드러내지 않도록 지혜롭게 행해야 합니다.
오늘 한나는 자신의 열등감을 어떻게 해결했나 눈여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한나는 자신의 열등감은 무시하고 오히려 새로운 삶에 전환점으로 삼고 해결을 위하여 하
나님께 간절히 매달렸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열등감을 스스로 해결 하려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열등감을 하나님에게 맡기면 하나님의 은혜로 해결 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우리의 믿음이 커지면 열등감은 반비례해서 사라집니다.
열등감을 바라보지 말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믿음을 굳건히 키워야 합니다.
자신의 약점에 매달리면 인생은 실패요, 약점을 극복하면 인생은 성공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약점을 인생의 승부처로 생각하고 적극적으로 극복하려는 자세가 필요
합니다.
팔이 하나 없는 여인이 있었습니다.
처녀 때부터 20여 년 동안 팔이 없이 살았으므로 그 여인은 열등감에 젖어 살아왔읍니
다. 마음속에는 깊은 상처가 잠재해 있었읍니다.
그녀는 사람들과 이야기할 때나 길을 갈 때에 팔이 있는 것처럼 위장을 하고 다녔습니
다. 사람들이 쳐다보거나 뒤에서 큰소리만 나도 그녀는 화를 내고 신경질을 부렸읍니다.
하루는 누군가에게 팔 없는 것을 감사하고 찬송하라는 이야기를 들었읍니다.
처음 으로 팔이 없다는 사실에 대하여 감사하고 찬송을 했읍니다.
그때 그녀는 생애 처음으로 자기 몸을 결박하고 있던 것에서 자유를 얻었습니다.
그후 그녀가 외출을 하려고 했을 때 위장을 하고 다니던 팔의 스카프를 풀어 버리고 자
신의 약점에 게의치 않고 대신 공무원 시험에 열심히 메달렸습니다. 그리고 합격을 하였
습니다.
그녀는 오히려 자신의 약점을 하나님게 감사하고 즐겁고 기쁘게 살아갈수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자기의 불구됨을 찬송함으로써 마음속의 깊은 상처가 나음을 받은 것입니다.
사람에게 누구나 약점들이 다 있습니다. 약점에 매달리는 것보다
현재 있는 것으로 감사하려는 마음! 이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이 더욱 소중한 것입니다.
없는 것으로 인해 낙심에 빠지지 말고 있는 것을 감사하고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한나는 자신에게 닥친 슬픔에 눈물을 기도의 눈물로 승화시켰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힘만으로는 절대 불가능합니다.
하나님 앞에 나와 눈물의 기도를 드릴 때에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한나는 슬픈 눈물에 고통을 기도의 눈물로 바꿨습니다
인격적인 수양은 그가 얼마나 인내심이 강한가에 따라서 점수를 메길수 있는 것입니다.
인격이 덜된 사람은 기분이 나쁘면 금방 화룰 내고 분을 품고 소동을 벌입니다.
그러나 수양이 된 사람은 인내를 합니다. 한나는 인내하는 연인입니다.
1장 6절에 보니까
한나는 브닌나의 조롱과 무시로 인하여 그의 마음이 격동하도록 슬펐고
1장 10절에 보면 한나는 마음이 괴로워서 여호와게 나아가 눈물로 통곡하엿습니다.
그러나 한나는 자신을 모욕한 부닌나에게 분노를 표시하지 않았습니다.
한한나는 부닌나의 모욕에도 불구하고 맞대고 싸우기를 포기하고 대신 하나님께 매달리는
눈물의 기도를 통하여 오히려 자식을 얻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믿는 사랑에게도 불신자와 똑같이 슬픝 일이 얼마든지 다가올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는 사람의 특징은 슬픔의 눈물을 기도의 눈물로 승화시키는 특징이 있어야 합
니다.
마치 우리가 육상에 보면 이어달리기를 하듯이 탄식의 눈물은 기도의 눈물로 변화시켜
하나님의 은혜로 축복이 되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한나는 간절히 기도하다가 급기야 서원기도를 드리기 시작하였습니다.
1장 11절에 보면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아보시고 나를 생각하시고 주의 여종을 잊
지 아니하사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겠습니다(11절)."
여러분 서원기도를 하더라도 하나님과 흥정하는 식의 서원기도는 금물입니다.
서원기도는 무조건 하나님께 약속을 이행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여 이렇게 해 주시면 나도 드리겟나이다" 하고 서원하는 것은 하나님과 흥정하
는 것입니다.
서원 기도란 하나님을 무조건 믿고 "하나님 앞에서 실천하겠다는 것을 선언하는 것"입니
다.
한나는 하나님께 서원 기도한 후에 한나의 얼굴에는 다시는 수색이 없어 젔다고 1장18절
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기도 후에 얼굴에서 수색이 사라졌다는 것은 응답이 올 것을 믿는 믿음의 기도를 드렸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기도하고도 걱정이 끊이지를 않는 것은 "믿음의 기도"를 드리는 것이 아
니라 "의심의 기도"를 드리기 때문인 것입니다.
기도라고 다 똑같은 것이 아닙니다.
믿음의 기도도 있고 의심의 기도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문제를 여호와 하나님앞으로 갖고나와 슬픔의 기도를 눈물의 기도로 바
꾸어 드림으로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한나의 신앙의 모습을 본받아야 합니다.
세 번째 :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삶에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심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았습니
다. 그런데 구원받은 사람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과 분명한 차이가 있어야 합니다.
진짜 살아계신 예수님을 믿는다면 믿기 전과 믿은 후가 차이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정말로 큰 변화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그런데 믿기 전과 아무런 차이를 만들어내지 못한다면 우리는 추상적인 하나님을 믿는
것이지 살아계신 하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단순히 천국에 가는 것만이 믿음의 처음이요 끝은 아닙니다.
]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았으면 변화가 생활속에서 나타나야 합니다.
1) 믿은 후에도 아직 삶과 마음이 전반적으로 어둡다면,
2) 그리고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이 배양되지 않았다면,
3) 또한 입이 크게 열리지 않고 위축되어 있다면
이것은 아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참된 믿음에 들어간 것이 아닙니다.
믿기 전과 믿은 후가 다른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을 가졌으면 분명히 달라야 합니다.
특별히 믿는 사람들은 인간 관계가 변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나를 싫어하는 사람이라도
이제 내개 예수 믿었으니 나를 좋아하게 되는 그러한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누군가 나를 싫어한다면 그 일차적인 책임은 나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가 나를 싫어하는 것은 그 사람 책임만은 아닙니다.
그가 나를 싫어하는 이유의 상당한 책임은 자신에게 있는 것입니다. .
내가 누구와 자꾸 부딪치는 이유를 그 사람한테 찾는 것은 재고해 봐야 합니다.
사람은 내 눈 앞에 들보는 안보여도 남에 눈에 틔는 잘 보이는 것입니다.
아무리 돌이 날아와도 부드러운 솜으로 받으면 소리가 안납니다.
그러나 얇은 생철판으로 받으면 요란한 소리가 나는 법입니다.
지금까지 내 성품이 냄비처럼 쉽게 달아 올랐다가 식는 스타일이라면 무쇠솥처럼 바귀어
야 합니다.
지끔까지 조그만 돌이 날라와도 시끄러운 생철판같은 마음이라면 이제 부터는 두터운 솜
같은 마음이어서 왠 만한 일에는 인내로 대꾸함으로서 소리가 안나는 브드러운 성품이 되
어야 할 것입니다.
노인이 이제 세상에 나가서 살려는 젊은이에게 충고를 하였습니다.
"젊은이, 모욕은 진흙과 같은 걸세. 진흙은 마른 뒤에 털어야 잘 털린다네. 세상에 나가
살려면 여러가지 속상하겠지만 조금만 참게. 그러면 일이 쉽게 풀릴 걸세. 만약 자네가
감정대로 행동을 한다면 자네는 반드시 후회하고 말걸세"
젊은이는 지혜로운 사람의 충고를 받아들이고 진흙이 마를 때를 기다리듯이 분노를 먹지
않고 인내하였습니다.
그러자 잠시 화낼 일도 시간이 지나자 별것이 아닌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훌륭한 인격일수록 자기 감정을 잘 다스립니다.
분노는 상대방의 잘못으로 인한 것도 있지만 자신의 교만과 상처받은 열등감으로 인하여
더 확대되는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나의 인간관계는 나의 문제입니다.
내가 예수 믿는데 부딪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인내를 아직
우리가 깨닫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참된 믿음은 삶에 참된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변화! 이것은 믿음의 생명입니다.
신앙이 위대한 것은 우리의 삶에 기적과 변화를 가져다 주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능력이기 때문에
나의 가장 부족한 약점을 가장 위대한 도구로 변화시키는 초석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정말 위대한 일입니다.
우리 앞에 천국의 길이 열렸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천국을 소유하게 할 뿐만 아니라, 천국에 길이 내
앞에 있으니 세상에 웬만한 일에 아득바득 메달릴 것 없는 것입니다.
2장 1절에 한나가 대적 앞에서도 입이 열리는 대범함을 보여 주었듯이 우리의 삶도 대범
해 지는 것입니다.
미웠던 사람 앞에서도 대범해지고 슬픈 일 앞에서도 대범해 지고 나를 괴롭히는 열등감
앞에서도 대범해 지는 것입니다.
믿음은 우리의 삶을 대범하게 만들며 긍정적이고 즐겁고 기쁜 삶에 변화를 일으켜야 합
니다.
아울러 우리는 하나님을 믿으니 하나님에게 우리의 모든문제에 해결을 맡기는 것입니다.
신실한 한나의 믿음은 대범해지고 자신의 고민과 문제를 하나님에게 맡기고 인생을 즐겁
고 기쁘게 살아가는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이러한 변화가 금년 내내 우리의 삶속에 일어나기를 주님에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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