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12월 24일 누가복음 2:1-14 땅에서는 평화로다 2001-08-20 00:43:33 read : 16501
지금으로부터 약 150년전 미국 오하이오 주에 가난한 개척농민의 아들로 태어난 소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소년때에 어머니마저 잃게 되었습니다. 그의 어
머니는 임종을 앞두고 그의 아들에게 때묻은 성경책 한 권을 주면서 "다른 사람들은 자녀
들에게 땅도 물려주고 돈도 물려 주는데, 나는 너에게 아무 것도 물려줄 것이 없다. 그러
므로 너는 이 엄마 생각이 날때마다 이 성경을 읽으라, 그리고 이 성경 말씀대로 살려고
애를 쓰라"고 마지막 유언을 했습니다.
이 소년은 국민학교 문앞에도 가지 못하고, 여기 저기 떠돌아 다니며 날품을 팔아 겨우
연명하였습니다. 그리고 청년으로 성장했습니다. 그가 오하이오 주의 어느 농장에 취직하
여서 일하는데 잠자리가 없어서 말들과 함께 창고에서 자야만 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충성스럽게 일을 했고 시간만 나면 성경을 읽고, 주일이면 꼭 교회에 나
갔습니다. 그 농장 주인에게는 딸이 있었는데 고명딸이 이 청년을 사랑하게 된 것입니다.
그것을 눈치챈 주인은 온갖 욕설로 그 청년을 내쫓아 버렸습니다. 그리곤 30년이 흘렀습
니다.
그 농장 주인은 집을 수리하려고 말 창고를 뜯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창고 구유 통에 옛날 그곳에 기거했던 청년의 이름과 함게 그곳에 들어왔던
날과 나갔던 날도 같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새겨진 이름을 자세히 보니 그 당
시 대통령이었던 "제임스 아브람 가필드" 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청년은 미국의 20대 대통령 가필드 였으며 그는 그곳에서 쫓겨난 후에 성실하게 공부
해서 대학을 졸업하고 미합중국의 대통령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제서야 그 농장 주인은
자신이 대통령의 장인이 될 뻔 했던 사실을 발견하고 후회했다고 합니다.
그때 청년 가필드가 말 구유통에 자신의 이름을 새기면사 읽었던 성경은 아마 오늘 우리
가 읽은 눅 2장의 내용이 었을 것입니다.
눅 2장은 아기 예수 탄생의 이야기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우리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늘의 보좌를 버리고 아기로 오
셔서 차디찬 이 땅위에 말 구유위에 누우신 것입니다.
추운 겨울날에 연약한 여인은 땀을 흠뻑 흘리며 초산을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는 헛간에 누워있었고 추운 밤에 태어난 어린 아기는 말 죽통 지푸라기 위에 누
워 있읍니다.
그 어머니는 추운데 해산하느라고 얼마나 많은 고통과 땀을 흘렸겠으며, 해산후 찬 공기
에 얼마나 추위가 몰려 왔겠읍니까 ?
더구나 어머니 배속에서 따듯하게 있었던 어린 아기는 얼마나 추웠겠읍니까 ?
주변 사람들은 이들의 형편을 다 알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누구 하나도 그들을 자기
방으로 데리고 가서 추위를 녹이고 따뜻한 물로 씻겨 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추운밤에 산모와 갓 태어난 아기는 바깥 헛간에서 밤을 보냈습니다.
그래도 사람들은 무관심햇습니다.
세상은 그제나 이제나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의 마음에 사랑이 없으니 예수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시고 싶겠읍니까 ?
우리는 너무 이웃의 문제에 무관심하고 있습니다.
미국 어느 교포 교회에 목사님이 예수님에게 관심을 갖고 예수와 함게 동행하면서 관계
된 삶을 살아야 한다고 설교를 했습니다.
그때 교회 새로 나온 새신자가 주보 내용을 보고 옆 사람에게 질문했을 때에 그 교인이
"난 몰라요 나하고 상관없어요"(I don't know I don't care)라고 대답을 했답니다.
인간의 무관심과 개인적인 이기주의는 가장 무서운 미움의 표현 방법으로 사랑의 반대는
미움이 아니라, 무관심입니다.
당시 로마황제 가이사 아구스도는 로마 사람과 로마가 통치하는 모든 식민지 백성들은
다 호적을 새로 하라는 영을 내렸읍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자기 고향을 찾아갔읍니다.
그래서 나라가 온통 난리였읍니다.
명절에 귀성전쟁이 일어나는 것과 같이 온 세상이 복잡하고 바빴읍니다. 그래서 예수님
이 그곳에 오셨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몰라 보았읍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베들레헴에 나신다는 것은 이미 수백년 전부터 예언된 것이다.
구약은 메시야가 다윗의 후손으로 오실 것이며 다윗의 고향인 베들레헴에 오실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가이사의 인구조사를 역이용하셔서 요셉과 마리아를 베들레헴까지 데려
다 놓으신 후 거기에서 예수님을 나게 하셨습니다.
몇일전에 어느곳을 차를 몰고 지나가는데 담벽에 누구누구가 사법고시에 합격되었다고
여기 저기 프랑카드를 걸어 놓았습니다.
물론 기뻐 할 일입니다.
그러나 사법시험 합격해서 제 한몸 잘살고, 자기 특권 누리고 혼자만 잘 산다면 무슨 현
수막 걸어 축하할 일입니까? 현수막 값이 아깝지요.
정말 기뻐해야 할 일은 힘없고 약한 자들 편에서 그들을 위하여 애쓰는 법관이 되어야
값진 합격인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을 보면 "유전 무죄 무전 유죄"로 사법부의 비리를 생
각하니 프랭카드를 바라보는 마음이 씁슬할 뿐입니다.
기쁜 소식은 다함게 나누어야 합니다.
그러나 아기 예수의 탄생이 요즘 우리들만의 잔치가 되었습니다.
예전에 흥청거리던 기분은 다없어지고 어찌보면 초라하기 조차한 것이 요즘 성탄절의 현
실입니다.
그러나 세상에 아기 예수의 탄생만큼 역사적이고 위대한 일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의 탄생은 인류 최대의 기쁜 소식이요. 인류에게 내린 최대의 축복입니다.
세계 역사가 주전이 주후로 바귀고 인류의 구원의 문제가 해결된 사건인데 사람들은 실
감을 못하고 우리는 까지도 예수 탄생의 현실감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탄생을 까마득한 옛날 신화처럼 생각하는데
사실은 예수님은 알렉산더 대왕이나 로마의 시저나 중국의 공자 보다 후대에 탄생하
신 분입니다.
예수님 당시 퍼블리우스 렌트우스(Purlieus Lentlus)라는 사람은 예수님을 자세히 살펴
보고 로마 원로원에 예수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써 보냈습니다.
마치 라디오 방송에 아나운서가 그의 모습을 중계하듯이 섬세하게 기록한 것입니다.
잘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요사이 덕성이 높은 한 사람이 예루살렘에 나타났는데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라고 합니
다. 이방인들은 그를 진리의 선지자로 받아들이고 있으며 그의 제자들은 그를 하나님
의 아들이라고 부릅니다.
그는 죽은 자를 살려내며 여러 가지 형태의 병을 고쳐 주기도 합니다.
키는 큰 편이고 잘 생겼으며 존경심이 나면서 사랑과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인물입니
다. 그의 머리칼은 잘 익은 밤 색깔이며 동양적인 모습에 굽실굽실한 머리칼이 어깨
까지 닿았습니다.
그리고 이마 한 가운데에서 머리칼이 좌우로 갈라져 양쪽으로 흘러 내려 갔으며, 나
사렛 사람들의 풍습을 갖고 있습니다.
그의 이마는 뚜렷하면서 우아해 보이며 얼굴은 점이나 주름이 없이 아름답고 붉은 빛이
돌며 코와 입은 무엇으로 표현할 수 없이 날카로운 데가 있습니다.
그의 수염은 머리와 같은 색깔이나 짙으면서 길지 않으며 순결해 보이면서 성숙미가 있
어 보이고 그의 눈은 회색이며 민첩하고 깨끗해 보입니다. 그가 꾸짖을 때는 무서웠으며
타이를 때는 친절하면서도 분명한 데가 있었고 대화할 때는 유쾌하면서 흡인력이 있어
보입니다.
사람들은 그가 우는 것은 보았으나, 웃는 것은 본 일이 없으며, 몸매는 아주 훌륭해
보이며 겸손하고 지혜로워 보이고 어떤 사람과도 견줄 수 없이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
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얼마나 생생한 묘사입니까? 그리고 그의 모습이 얼마나 당당하고 아름다운 모습
입니까
아기 예수가 이땅에 오셨지만 구원의 역사는 서서히 이루어 집니다.
예수의 사역은 베들레헴에서 부터 조용하게 아무도 모르게 마구간에서 부터 시작 됩니
다. 구원의 역사는 말 구유에서 부터 시작 됩니다. 이것이 성탄입니다
베들레햄에 오신 아기 예수는 하나님께서 친히 육신을 입으시고 이땅에 오신것입니다.
그분은 마굿간에서 태어나자마자 그를 해치려는 사람을 피하여 애급으로 피난길을 나서
기도 합니다.
고난과 함께 태어나 철처하게 고난을 체험하시고 그리고 마침네 십자가에 달려 돌아 가
셨습니다.
당시의 유대인들은 하늘로부터 초자연적으로 도래하여 막강한 권세를 가지고 세상을 한
번에 날려버릴 그런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이 기다렸던 것과 정 반대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기대와는 너무도 동떨어진 실망스런 모습이었습니다.
더구나 예수님은 보통사람이 탄생할 장소도 얻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여관의 헛간을
겨우 구해, 짐승의 우리에서 탄생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왜 이렇게 탄생하셨습니까?
신약성경은 빌립보서2:6-7절은 우리들에게 그 해답을 제공합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
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하지 않으셨습니다.
육체를 입고 이세상에 오신 것 자체가 예수님의 낮아지심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과 같
은 몸을 입으셨고 성경은 그것을 종의 형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예언대로 이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구주로 오셨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에 자기 백성들을 동참시키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낮고 비천한 우리들에
게도 구원을 주시려고, 종의 형체를 입고 사람이 되어 오셨습니다.
즉 예수님은 겸손과 낮아짐의 표본으로 오셔서 가난하고 핍박받고 고통종에 있는 사람들
편에 서신것입니다.
예수님은 해마다 여러분을 찾아 오셨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만나지 못한 것은 예수님
이 오셔도 우리는 너무나 바바서 진정으로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너무나 바쁩니다. 생활이 괞찮을 때는 먹고 마시고 노느라 정신이 없었고 생활이
어려울 때는 먹고 사느라고 정신이 없었읍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작년에도, 그 작년에도, 매년 이 땅에 오셨지만 그냥 문지방에 서 계셨
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의 마음과 생각은 너무나 쓸데없는 것으로 가득차 있읍니다.
어른들은 망년회로 먹고 놀 생각으로 가득차 있고 아이들은 산타크로스 할아버지가 가져
다 주는 선물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차 있읍니다.
우리는 이제 예수님을 진정으로 영접하여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육신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셨는가
하나님은 구약에 선지자를 통하여 인간의 구원을 시도하였으나 끊임없이 완악하고 불순
종한 인간의 모습에 하나님은 실망을 하셧습니다.
이제 그분이 친히 인간의 육신을 입어보시기 원하신 것입니다.
존 하워드 그리핀(John howard griffin)이라는 백인 미국 사람이 흑인들이 받는 멸시와
고통이 얼마나 심각한가 몸소 체험해 보기 위해 자신을 흑인처럼 만들어 흑인 행세를
해 보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래서 피부가 검어지는 약을 먹고 피부가 잘 타는 약을 바르고 햇빛에 피부를 태우고
검게 보이는 약품을 바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여행을 떠났더니 승차 거부를 당하고 식당에서는 음식을 팔지 않고 호텔에서도
쫓겨나는 등 사람 취급을 받지 못했습니다.
온갖 핍박과 천대를 받고 나서 "나 같은 흑인" 이라는 책을 쓰면서
하나님이 왜 종의 형체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는지 그 뜻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타락한 인간을 사랑하셔서 구원하기 위하여 선지자들은 통하여 말씀도 하
시고 율법으로 다스려 보려고도 했으나,
인간이 돌이키지 아니하므로 친히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찾아 오신 것입니다.
우리는 상대방의 입장을 알려면 상대방의 형편이 되어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목사님하고 스님이 친하게 지냈습니다. 어느날 목사님이 스님과 함께 길을 가다가 개미
를 밟았습니다. 스님이 깜짝 놀라서 말 합니다. " 목사님 어쩌다 이 많은 생명을 죽었소?
당신은 천벌을 면치 못할 것이요 죽은 개미 가운데는 우리 할아버지가 계시는지도 모르
오." 윤회설을 믿는 불교인지라 스님이 오만상을 찌푸리며 혀를 찹니다.목사님이 무안해
졌습니다. "발바닥에 눈이 없어서 그만 실수를 했습니다. 어찌하면 좋겠소? "
그러자 스님이 대답합니다. "한가지 길이 있소, 당신이 죽어서 개미의 몸이 되어서 죄
를 갚는 길 밖에 없소 " 그러자 목사님이 예수님의 탄생을 설명했습니다.
"옳은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 개미같은 미약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인간의
몸을 입고 이땅에 오신것입니다. 라고 예수가 이땅에 온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그러면 아기 예수는 무엇을 이루기 위하여 이땅에 오셨는가?
천군 천사들에 의하면 아기 예수는 1112211이제 11
"하늘에는 榮光 땅에는 平和"를 이루기 위하여 이땅에 오신 것입니다.
하늘의 영광은 우리가 당하는 모든 고난과 逆境 가운데서도 신앙을 지킬 때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가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천사의 얼굴을 하고 원수를 용서하는 스데반을 통해
서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갑니다.
주의 영광은 낮아짐에서 돋보이는 것입니다.
인간을 위해서 낮아지심은 그분에겐 영광이었습니다.
인간을 위해서 섬기심도 그분에겐 영광이었습니다.
세상은 남보다 앞서고 남들 위에 앉고 정복하고, 권력위에 있는 것을 영광이라고 합니
다. 가이사가 그런 사람입니다. 그는 자기의 영광을 위해서 힘없는 백성을 군사력으로 눌
렀습니다. 군대를 파송해서 힘으로 평화를 유지했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영광을 찾았습니
다.
그러나 예수님의 영광은 가난하고 핍박받고 고통종에 있는 사람편애서 그들을 도움으로
서 영광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땅에 예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하여 우리는 어떠한 자세를 가져야
하는가?
첫 번째 자기를 포기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땅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 내려면 자신을 먼저 포기해야 하는 것입
니다.
우리는 지난날의 내 성공 철학 출세 내 사고방식 내 생각 내 상식 내 계산 내 즐거움 내
꿈까지 포기해야 합니다. 육적이고 인간적인 쾌락과 연락을 모두 포기해야 합니다.
그리고 내안에 들어와 계신 성령이 나를 지배하고 장악하고 지배하도록 해야 합니다.
저는 몇일전 텔레비전에서 포천에 가나안 마을을 취재한 것을 보았습니다.
그곳은 중도에 소경된 사람들이 모여 사는 예수 공동체입니다.
그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중도에 실명한 사람들입니다.
어떤 사람은 병 때문에 실명되었고 어떤 사람은 포탄이 터저서 교통사고등 여러 가지 이
유로 소경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중도에 소경된 사람들은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보다 적응하여 살기가 대단히 어
렵답니다. 당연히 어려울 것입니다.
얼마전까지 밝은 눈으로 마음대로 여기 자기 다녔는데 갑자기 앞이 절벽으로 안보이니
얼마나 답답하겠스니까?
그래서 그들은 대부분이 한번 이상 자살을 시도한다는 것입니다.
그곳 원장 역시 소경 목사님인데 그분 말씀이 중도에 소경된 사람이 사는 길은 빨리 지
난날을 포기하고 잊어야 살수있다는 것입니다.
지나날 눈이 잘보일 때를 생각하면 얼마나 답답하겟습니까
지난날 눈이 밝았을 때는 좋았는데 하고 그 때를 잊지 못하면 그의 인생은 계속 좌절과
절망뿐입니다.
그가 살려면 빨리 지난날을 포기하고 닥친 환경을 수용하고 닥친 현실에서 충실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 믿는 다는 것도 어찌보면 중도에 소경된 사람과도 같습니다.
지난날 좋았던 오락 취미 욕심을 포기해야 합니다.
때로 주일을 지켜야 하기 때문에 다녔던 낚시 등산도 포기해야 하며 좋았던 술과 담배도
끊어야 하고 히히덕거리던 술자리도 삼가야 합니다.
지난날의 구습과 자기를 포기해야 합니다.
어느 집사님이 사업을 하다가 망했습니다.
그때는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어서 마음대로 먹고 입고 썼는데 갑자기 수중에 돈이 떨어
지니 얼마나 힙듭니까?
그래서 그 분이 저에게 하루 하루 사는 것이 너무나 힘들다고 말합니다.
왜 힙듭니까? 지난날 잘나갈 때를 잊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가 말해 주었습니다.
집사님 지난날을 빨리 잊으십시오 그래야 삼니다.
여러분 우리는 지난날 헛된 꿈을 포기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과 경쟁에서 승리함으로 얻었던 기쁨과 영광을 포기해야 합니다.
예수안에 영광은 경쟁해서 승리함으로 얻는 영광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를 포기하고 낮은 자리에서 겸손함으로 참된 영광을 받는 것입니다.
두 번째 이땅에 평화는 먼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이 땅에 평화가 있습니다.
한 부부가 농사일을 마치고 멀리서 교회의 종소리를 들으면서 하나님게 영광의 기도를
드릴 때에 모습이 평화로와 보이는 것은 담흘려 일한 후에 드리는 기도였기 때문인 것입
니다.
이땅에 평화는 땀흘려 수고한 후에 드려지는 것입니다.
인류의 역사는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전쟁의 역사이고, 이룩한 평화도 폭력과 압제와 힘
으로 이룩한 평화였습니다.
어떤 평화가 참된 평화입니까? 하나님과 화평한 평화라야만 진정한 평화입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되는 평화의 시대가 왔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지고 오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 안에 들어
가야 진정으로 하나님과 평화의 관계가 맺어집니다.
하나님과 평화가 맺어지지 아니하면 인간과의 진정한 평화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평화를 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하늘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야 땅에서 평화가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지
않고는 진정한 평화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자기백성과 함께 계실 때 하나님의 평화는 나타납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방법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서 그분과 함께 평화롭게 살게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영광으로 하나님의 평화로운 세계로 인도하시기 위해서 오셨
습니다.
여러분은 화평를 원하십니까?
그러면 예수님을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하고 난 후에 하나님과의 평화가 이어지는 것입니
다.
하늘의 영광을 여러분에게 나누어 주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아기로 오신 주님을 진정으
로 삶에 한가운데로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그분은 메시야로 오셨습니다.
그분을 여러분의 인생에 주인으로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어떤 사람이 "행복의 비결"이라 는 책에 행복은 건강, 재물, 아름다움, 즐거움, 조화 등
이 있어야 된다는 소제목이 든 책을 출판하고 한권을 존경하는 유대인에게 주었습니다.
그 유대인 그 책에 소제목을 읽어보고 행복의 비결 중에 빠진 것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무었이냐고 물어보니 그는 "평화"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사람이 건강과 아름다움과 자식과 재산이 아무리 많이 있어도 평화가 없이 다투
기만 한다면 행복할 수 없는 것입니다.
어느 가정이든 행복하려면 평화의 주인공이신 예수님이 있어야 합니다.
세 번째 이땅에 평화는 다른 사람을 용서하고 화해해서 다른 형제와 평화를 누리는 것입
니다.
평화를 주신 주님 때문에 우리는 도저히 용서 할수 없는 사람도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
는 것입니다.
로마서 12장 18절 이하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명령하십니다.
'할 수 있거든 너희 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 하라.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
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아라. 원수를 사랑하라.'
주님이 이렇게 명령하실 때에는 그 분이 내 안에 계시고 그분이 나에게 능력 을 주시기
때문에 형제까지도 나는 용서하고 포용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누구나 서로를 사랑가운데 '나는 용서받 아야 될 사람이요, 용서해야 될
사 람이요, 당신도 용서받아야 할 사람 이요, 항상 용서해야 될 사람입니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형제와 원수가 되어 있고 묵은 상처가 고침받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
니다.
입으로는 용서한다 하면서도 마음으로는 용서를 안하는 것입니다.
입으로는 좋은 말 을 하지만, 속으로는 그 사람의 실수를 절대로 잊어 버리지 않는 것입
니다. 부부간에도 그렇습니다. 고부간에도 그렇습니다. 형제간에도 그렇습니다.
여러분, 만약에 우리가 이런 사람이라면,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아직 만 나지 못
한 사람입니다. 하나님 앞에 모든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과 평화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가
없습니다.
세상을 살다 보면 감정이 상할 때도 있고 심한 다툼도 있을수 있고 서로 상처를 주기도
하고 피해를 입히기도 합니다. 이것이 인간이 사는 세상입니다.
'나는 절대 누구에게도 피해 주지 않고 어떤 사람에게도 상처 주는 일이 없을 것이다.'
라고 장담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는 서로 피해를 줄 수밖에 없고 서로 피해 받을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누구나
다 감정이 상할 수 있습니다. 오늘 친했다가 내일 원수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평화의 왕이 내 가슴이 항상 살아계셔서 그분이 주시는 은혜를 가지고
무조건 일곱번씩 일흔번이라도 형제를 용서해야 합니다.
서로를 용서함으로써 평화를 누리고 평화의 왕을 모시고 사는 사람이 될 때에 이땅에 평
화가 오는 것입니다.
마음에 상한 감정과 증오가 있으면 내가 손해를 보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을 갖고 있으
면 기도가 잘 안됩니다. 영적으로 병들어 있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병들어아 있으면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과거의 묵은 감정이나 원한, 피해의식을 다 묻어 버리십시오.
평화의 예수님이 나를 지배하시어 내가 하나님과 화목함으로서 우리가 가는 곳마다 평화
와 행복을 만드는 평화의 사신이 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평화 의 왕이 오셨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 어디를 가든지 가는 곳마다 내가 만나는 사람들과 평화를 만듭시다.
예수님의 탄생으로 우리가 무엇을 얻었습니까?
우리는 소망을 얻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든 병을 다 고칠 수 있지만 한 가지 고칠 수 없는 것이 있는데 그것
은 절망이라는 병'이라고 합니다.
뭐가 절망입니까? 불신이 절망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을 믿지 않으니까 절망밖에 남는 것이 없습니다.
불신을 절망이요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입니다.
사람에게 소망이 없고 절망만 남으면 더이 상 그는 살아야 할 이유가 없음으로 인생을
포기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살다 보면 자신의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어려움이 닥쳐옵니다.
그러면 어제 까지도 명랑했던 사람이 금방 기가 죽어서 슬픔에 점기는 모습이 됩니다.
우리는 아무리 두려움이 닥쳐도 소망을 잃어 버리면 안됩니다. 소망을 잃어 버리면 모
두를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결론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인생은 누구나 크리스마스 추리처럼 찬란하게 살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살아가면서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손쉽게 술과 쾌락을 가까이 하다가
절망에 빠져 버리고 맙니다. 그리고는 헤어나오지 못한 채로 허우적거리고 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한 우리에게도 사랑을 베푸십니다. 우리의 절망을 보시고 위로하십
니다.
그 분은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우리를 절망에서 구원하기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그러므
로 누구라도 예수그리스도를 마음에 모시고 그분의 통치를 받는다고 한다면 그는 참된 평
화를 누리게 될 것이며 그리스도의 영광의 빛안에서 찬란한 인생을 살아갈 수 있을 것입
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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