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10월3일 빌1:27-30 제목:빙거 2001-08-19 22:05:31 read : 10290
빙거란 표, 증거, 흔적 즉 영어로 Token 버스표
천국에 들어가는 표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예수를 믿음으로 천국에 가지만 놀랍게도 믿었다고 다 천국에 가는 것이 아
니라 빙거 즉 예수를 잘 믿은 흔적의 표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마 7:21절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가는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우리가 주님의 손을 잡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의 손목을 잡아 주심으로 천국에 가는
것입니다.
즉 선택권이 하나님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은 무엇을 보고 선택할 것인가
27절에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아온 표 빙거 흔적을 보시는 것입니다.
아울러 천국에 이르는 표도 사람마다 다른 것입니다.
고향에 가는 사람도 버스를 타고 가는 사람도 일반버스 표인지 좌서 버스표 고속 버스표
비행기표가 있듯이
천국에 이르는 표도 사람마다 다르다 즉 각 사람의 일한 바에 따라서 상급이 다르다는
이야기다
28절 보니까 멸망의 빙거도 있고 구원의 빙거도 있다고 하였습니다
갈 6:17절에 보면
사도 바울은 자신의 몸에 구원의 흔적 즉 구원의 표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증거하다가 붙잡혀서 40대를 맞으면 죽을지 모르니까 40에 하나를 감한 매를 맞고
돌 팔매질을 당한 표 즉 몸에 흔적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요한 계시록에 보면 어떤 사람에게는 사단의 표도 있습니다
그러면 이 시대는 우리는 어떻게 구원의 표를 얻을 수가 있을까?
27절 복음에 합당한 생활을 함으로서 구원의 빙거를 가져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복음에 합당한 생활이란 무엇인가
27절에 하반 절에 보니
첫 번째 복음에 합당한 생활이란 서로 협력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부부간이건 가족간이건 성도들이건 서로가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서로 협력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결혼식을 할 때에 주례 선생님이 질문을 합니다
신랑 이000군과 신부 장00양은 기쁠 때나 슬플 때나 항상 함께 할 것을 서약합니까?
결혼하신 분들은 모두 네 라고 대답을 하였을 것입니다.
서로 협력하되 기쁠 때만 협력하는 것이 아니고 슬프고 고난의 때에도 함께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TV에 보니까? 남편이 교통사고 나서 반신 불수가 되었는데 그 아내가 어린 남매
를 놔두고 집을 나가 버렸어요?
그래서 다 늙은 시어머니가 와서 아들과 손자 손녀를 돌보는데 벽 한쪽에는 결혼식 사진
이 붙어 있더라구요?
기쁠 때는 함께 있고 슬플 때는 도망가는 사람도 있는 모양입니다.
27절에 보니까 협력하려면 먼저 일심(一心)이 되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일심이란 예수 안에서 한마음을 이루라는 것입니다.
서로 도와 가고 서로 협력하여 사랑하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첫 번째 조건은 예수 안에서
한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본문에 보니까 일심으로 "서서"라고 하였습니다
앉아서 쉬는 자세가 아니라 서있는 자세는 바로 일하는 자세요 봉사하는 자세요 수고의 땀
을 흘리는 자세요 자신의 책임을 다하는 자세인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이든지 얻고자 원하면 그만한 수고의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수고의 대가를 치르지 아니하고 얻기를 바라면 그것을 세상 사람들은 도독 심보라고 하
는 것입니다. 우리는 각자가 자신이 맡은 임무와 책임이 있습니다
가정 안에도 남편에 책임과 임무가 있습니다
경제적인 책임이 있으며 할 수 있다면 아내도 경제를 서로 도와야 합니다.
여성도 밖같 일터에서 일함으로서 자신의 존재를 찾고 삶에 보람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
니다.
사람에게 편안 것은 게으름과 퇴보를 낳게 만드는 것임으로 자신이 건강할 때 능력껏 일
하는 것은 보람된 것입니다.
예수안에서 서로 일하되 27절에 한뜻을 가져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한마음으로 한 목표를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족은 모두 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남편은 직장과 세상 속에서만 삶에 목적을 두고 살아가고
아내는 아내대로 자기 취미에 젖어서 삶에 목적과 뜻을 두고 살아감으로서
가정이 비어 있다면 한 마음이 아닌 한 가정에 두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한달 전에 저는 용인에 있는 강남 대학교회에 집회를 가게 되었습니다
저를 초청하는 임무를 맡은 장로님 차에 장로님의 사모님과 동승하여 타게 되었는데
그 사모님이 자신은 항상 자기 남편에게 미안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무엇 잘못한게 있는냐고 물었더니
"젊은 시절에 자신의 남편이 신학을 하고 싶다고 하였을 때에 결사코 반대를 하고 만약
에 신학을 하려면 자기와 이혼을 하라고 으름장을 놓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나이가 60이 넘어서 되돌아보니 그 동안 남편이 공무원 생활을 하였지만 그
삶이 항상 공허하였고 이제 정년퇴직을 하고 시간이 남어서 주님을 위하여 봉사하고 싶어
하지만 이제 몸도 늙었고 경제도 여유가 없어서 허덕이는 모습을 옆에서 보니 너무 미안
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 함께 신학을 한 친구가 지금은 큰 교회에 당회장으로 있
는데 더욱 그 교회에 어쩌다 가게 되면 더욱 남편이 신학을 하지 못하도록 막은 자신이
후회 스럽다는 것입니다.
이 부부는 서로가 뜻이 달랐던 것입니다.
가정은 부부간에 삶에 목적이 같은 공통 분모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같은 목표를 향하여 서로 수고의 땀을 흘리는 건강한 가정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
다.
두 번째 복음에 합당한 생활은
28절에 너희를 대적 하는 자로부터 두려워하지 말고 승리하는 것이 복음에 합당한 생활
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를 대적하는 자가 누구입니까?
우리를 유혹하고 미혹에 빠뜨리려는 악한 사단이 바로 우리를 대적하는 자입니다
그래서 그는 우리를 죄악된 생활로 유혹을 합니다.
그는 우리를 불신앙의 생활로 유혹을 합니다
그는 우리를 교만과 시기와 질투의 생활로 유혹을 합니다
그는 우리를 방종과 타락의 생활로 유혹을 합니다
그는 우리를 불순종과 이기적인 생활로 유혹을 합니다
그는 우리를 낙심과 좌절과 심지어는 자살의 길로 유혹을 합니다
그는 우리의 양심을 무디게 만들고 게으름과 타성에 젖은 삶으로 유혹을 합니다
그는 우리의 신앙에 의심과 회의를 갖게하고 그리하여 우리의 신앙이 냉냉하고 미지근하
고 차갑게 만들고 기쁨과 감격을 빼앗아 갑니다.
이 모든 것이 바로 우리를 대적하는 자의 소행인 것입니다.
우리를 대적하는 자는 항상 우는 사자와 같이 우리를 노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항상 깨어 기도하지 않으면 우리는 대적으로부터 패배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대적으로부터 지는 모습이 사망의 빙거 즉 사망의 표 사망의 흔적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같이 우리를 대적하는 것으로부터 승리할 때에 우리는 바로 복음에 합당한 삶
을 살수가 있으며 그 모습이 바로 구원의 빙거가 되는 것입니다.
세 번째 복음에 합당한 생활이란
29절에 "은혜"를 받는 것이 복음에 합당한 생활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은혜 받기를 사모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은혜란 사모하는 사람에게 임하는 것입니다.
저는 지난주에 서울 순복음 교회에 갔을 때에 성도들이 뜨겁게 은혜를 사모하고 있음을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벌써 찬양이 뜨겁고 기도가 뜨겁고 눈망울에 빛이 나는 것을 느꼈
습니다. (제 자랑같이 들리겠습니다만)
당연히 그날 큰 은혜가 넘치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집회후 집사님들이 저를 찾아와서 시간이 너무 짧았어요 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
습니다.
왜 은혜가 임했을 까요 제가 잘해서 그런게 아닙니다.
그들이 은혜를 사모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떤 교회는 제가 단상에 서면 느껴지는데
성도들이 마음에 팔짱을 끼고 어찌하나 두고 보자하고 고개를 뒤로 젖힙니다.
어떤 사람들은 길게 하지 않고 빨리 끝나기나 했으면 좋겠다 하면서 냉냉하게 구경꾼 심
정으로 바라보는 성도가 있습니다. 그 교회는 그날 은혜가 없습니다 그래서 끝난 후 돌아
가는 성도들의 모습들이 조용하고 발길이 무겁다는 것을 느낍니다.
저는 똑같이 합니다 그러데도 왜 결과가 다를까요
한교회는 은혜를 사모하였고
한교회는 은혜를 사모하는 마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은혜란 은혜 받기를 준비된 자에게 설교자가 주는 것도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
다.
그러면 하나님이 무엇을 위하여 은혜를 주시는가?
첫 번째 29절에 믿음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어느 성도가 상담을 합니다
목사님 교회에 나오지만 믿음이 약해지고 의심이 생기고 기쁨이 없어요
은혜가 떠났기 때문입니다
29절에 내용이 믿음은 은혜로부터 오는것 이라고 하였습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도 자신의 신앙이 냉냉해지고 기쁨이 없고 마음이 껄껄하고 의심이 생
기고 삶에 소망이 없다면 먼저 자신의 잘못을 철저히 회개하고 다음에 은혜 받기를 사모
하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기도하고 말씀읽고 묵상하고 말씀 듣기를 쉬지 말아야 합니다.
왜 하나님이 은혜를 주셨는가 두 번째 이유는
고난도 즐겨 받기 위하여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은혜를 주신 이유가 고난을 기쁘게 받기 위하여 주신 것입니다.
어떤 고난이냐
29절에 그를 위한 고난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하여 받는 고난을 저는 많이 듣고 목격을 합니다.
교회 집회때 전도 실습을 내보내면 성도 분들이 갔다 와서 전도보고 할 때에 고난받은
이야기를 합니다
어느 여자는 막 화를 내고 모욕적인 언사를 듣는 수모를 간증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성도들이 나갈 때는 걱정과 두려움에 젖어서 나가지만 갔다 와서는 한
결같이 기쁘고 즐겁게 사례들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가 임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도 전도를 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고난은 복음을 증거 할 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는 데에도 고난이 있습니다
우리 처남은 전화국에 다니는데 비교적 철저하게 신앙인의 자세를 고수합니다.
그래서 직원끼리 술좌석에 가도 절대로 술을 입에 대지도 않을 뿐더러 승진 때 되면 상
사의 집에 찾아도 가고 뇌물도 올려야 하는데 찾아가지 않았더니 승진도 늦었다고 합니
다.
그런데 이것이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어서 상급자 위주로 명예퇴직을 하다 보니 자신은
퇴직자 명단에서 빠졌다는 것입니다.
복음에 합당한 신앙생활을 하려면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성도란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제 10회 아시안 게임에서 달리기 부문에서 금메달을 3개나 따서 삼관왕이 된
임춘애 선수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녀는 자신의 아버지를 병으로 일찍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라면을 먹으면서 육상을
배우는데 그녀가 가장 부러웠던 것은 살밥먹고 우유 마시고 뛰는 아이들이 제일 부러웠다
고 하였습니다.
이런 고난 중에도 모진 훈련을 통하여 결국 삼관왕의 영광을 얻고 이화여자 대학교에 들
어가는 꿈을 이룰 수가 있었던 것은 고난 속에서 좌절하지 않고 더큰 영광을 위하여 수고
의 땀을 흘렸기 때문인 것입니다.
바로 고난이 승리의 지렛대가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해하는 고난이 있습니다.
자신의 잘못과 죄로 인하여 받는 고난은 고난이 아니라 징계입니다.
어떤 분은 고난을 열거하면서 교회를 열심히 다녔는데에도 이런 고난이 왜 나에게 있는
냐고 따집니다
그러나 고난이 아니라 징계인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지나친 탐심으로 인하여 사업을 무리하게 확장하고 죄와 방종으로 인하여 게으름과 나태
로 인하여 얻은 실패와 좌절은 고난이 아니라 징계이므로 우리는 철저히 회개하고 하나님
의 은혜를 사모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고난도 은혜 안에 있으면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고난을 무시하고 오히려 고난을 기쁨으로 여기는 습성이 있어
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은혜를 주신자의 모습인 것입니다.
즉 은혜를 받으면 고난도 기쁨이 되고 소망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 말을 정리하고 마치려 합니다
우리는 천국에 가려면 사망의 빙거가 아니라 구원의 빙거가 있어야 합니다
즉 복음에 합당한 생활을 하는 것이 구원에 이르는 빙거가 되는 것입니다.
복음에 합당한 생활이란
첫째로 서로 협력하는 것입니다.
부부간에 가족간에 상하간에 우리는 모두 협력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모두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고 서로 수고의 땀을 흘리며 협력하여야 하는 것
입니다.
두 번째 복음에 합당한 생활이란
우리를 유혹하는 악한 사단의 대적으로부터 승리하는 것입니다.
사단은 오늘도 내일도 끊임없이 우리를 넘어뜨리기 위하여 유혹을 합니다.
그때 여러분은 이렇게 소리를 지르시기 바랍니다
"이 악한 사단아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내게서 떠나 갈지어다"
세 번째 복음에 합당한 생활을 위하여 은혜 받는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은혜가 넘치면 믿음이 강건하여 지며
은혜가 넘치면 고난도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불신자들이 "예수 믿는 사람들은 고난을 당해도 고난을 무시하고 오히려 기쁨
과 소망에 넘치는 이상한 사람들" 이라는 평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먼저 은혜 받기를 사모하고
항상 기도하고 찬양하고 말씀 읽기를 쉬지 않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에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초대 교회의 성도는 복음에 합당한 구원에 빙거에 이르는 삶을 살았다
행2:44-47절에 보면 초대 교회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믿는 사람들이 다 함께 모든 물건을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서 나눠주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결한 마음으로 음식을 나누어
먹으며 하나님을 찬미하였다고 기록되었다.
그래서 총독 플리니는 기독교인들의 생활을 조사하여 로마 황제에게 보내는 편지에 무엇
이라고 기록하였느냐 하면 그들은 즉 기독교인들은 세상의 법을 잘 지키고 경건한 생활을
하는 모범적인 사람들이라고 기록하였던 것입니다.
요즈음 한국 기독교인들은 세상 사람들에게서 칭송을 받기는 커녕 비웃음과 조롱거리가
되고 있음을 일선에 전도 현장에서 느끼게 된다.
실제로 우리들 스스로 자신의 모습을 살펴보면 우리가 세상 사람들에 비하여 더 나은 삶
을 살고 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가 없다.
그러면 왜 이러한 초대 교인들이 이러한 복음에 합당한 생활을 유지 할 수가 있었을까?
그것은 그들이 로마의 핍박으로 고난의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고난을 통하여서 성장하였고 고난이 있을 때에 신앙이 신실하였다
그러므로 고난을 즐겁고 기쁘게 받아 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유대인이 앗수르의 아하수에로 왕 밑에서 포로 생활 할 때에 그 신하중에 하만 이라는
자가 온 유대인을 죽일 계획을 세웠을 때에 이때 유대인으로 왕후의 자리에 올랐던 에스
더가 그 사실을 알고 모든 유대인으로 하여금 삼일 동안 금식을 하게 하였다.
이때 모든 유대인들은 한마음 한 뜻으로 협력하여 금식함으로서 그 위기를 넘길 수가 있
었다
블래셋 민족이 거인 골리앗을 앞장세우고 이스라엘 군대 앞에 나왔을 때에 모든 군인들
이 두려움에 떨고 있을 때에 어린 다윗이 형들의 음식을 전하러 왔다가 그 모습을 보고
물 매돌 다섯 개로 골리앗 앞에서 당당하게 나아가 싸울 수가 있었던 것은 무슨 힘으로
그리 하였을 까요 성경에 보면 "천만인이 나를 둘러치려 하여도 내가 두려워하지 않음은
여호와의 신이 나와 함께 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여호와의 신이 누구입니까 성령 하나님을 말하는 것으로 바로 성령에 충만함을 받았기에
용감히 나가서 싸울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지만 불신자는 우리의 생활을 읽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활이 복음에 합당한 생활인가를 보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에 합당한 생활을 하려면
먼저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며 그러므로 성경을 많이 읽고 듣는 경건에
이르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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