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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1년 10월 20일 십자가 군병들아 (고전1:10-18)
    2001-10-21 04:58:08   read : 11535

    고린도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능력으로 사도 바울을 통해 고린도 도시에 세운 교회입니다.

    당시 고린도 도시는 헬라의 문화의 지혜와 철학이 흥한 도시였습니다. 그래서 고린도 교회도 자연히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떠난 뒤에
    고린도 교회는 복음의 본질을 버리고 교회 안에서 영향력을 가졌던 세상 지혜자들을 중심으로 파당이 생겨났는데 겉으로는

    나는 바울에게 속한 바울파다, 나는 게바 즉 베드로에게 속한 베드로파다. 나는 아볼로에게 속한 아볼로파다. 또는 그리스도파다.
    이처럼 자기들이 존경하는 스승에 따라서 분파가 발생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세울 때에 바울은 말의 지혜로 복음을 전하지 않았습니다.

    말의 지혜로 하지 않았다는 말은 당시 고린도 교인들은 인간의 철학과 지혜를 웅변력으로 표현하는 일을 즐겼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 사람들처럼 세상의 말과 지혜로 복음을 전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즉 복음이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 라고 하였습니다.

    어느 부흥사 목사님이
    복음 말씀의 진리가 빠진 합리주의적이며 예화로 가득찬 재미있는 설교를 하였습니다.
    어느 날이었습니다. 그 날도 매우 논리적이고 지성적이며 재미있는 설교를 하고 만족해 하며 강단을 내려 왔습니다.
    그 때 교회에 출석하고 있는 한 노인이 그의 앞으로 닦아왔습니다.
    “목사님, 오늘 설교는 참으로 유익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다음에는 사람들이 십자가 십자가 하는데 십자가가 나와 어떤 관계인지 설명해 주십시오.”
    노인의 요구에 따라서 십자가에 대한 설교를 준비하면서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다시 살펴보았습니다.
    설교를 준비하면서 영적 각성이 일어났습니다.
    그뒤로 그 목사님은 십자가 만을 전하는 부흥강사가 되었답니다.

    바울이 그렇게 헌신적인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인격적으로 체험하하였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아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닫고 그 사랑에 붙잡혔을 때에
    죽음도 불사하지 않고 복음을 위해 몸 바쳐 일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복음 안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를 인격적으로 만나고 체험해야 합니다.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을 향해서 "형제들아!"라고 불렀습니다.
    이 세상에 가족관계처럼 진한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고 교회 안에서 한 가족관계로 묶으셨습니다.
    그래서 구원 받은 우리는 하나님을 부를 때에 호칭이 '아버지'로 바뀝니다.
    교회 안에서 믿음의 식구들에 대한 호칭도 '형제' '자매' 라 부르게 됩니다.

    즉,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건 믿는 사람 모두 하나님 안에서 한 가족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이 가족공동체의 삶이 되기를 원하시며 요구하십니다.

    교회안에서도 남자성도를 보고 '형제님'이라 부르고 여성도들을 보고 '자매님'이라 부르는것이 자연스러워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모두 한 가족의 한 식구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형제간에 우애하고 다툼이 없다면 행복한 가정입니다.
    부모의 입장에서는 형제간에 우애하고 화목하는 모습을 보는 것만큼 더 큰 즐거움은 없습니다.

    반면 다툼과 분열이 보여진다면 큰 불효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유언을 하는 것을 보면 형제간에 우애있게 지내라는 것입니다.

    교회안에서 또한 가정 안에서 우애있는 형제애의 아름다움을 통하여 천국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 땅은 천국갈 연습을 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가족 공동체적 특성을 반영하고 예수님을 머리로 함께 나누는 형제들의 사랑공동체인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교회와 가정이 행복하지를 않습니다.
    우애와 사랑 보다는 미음과 갈등이 많은 것이 현실입니다.

    교회가 분열하고 다투는 것은 기독교의 치부를 드러내는 일이요
    이것만큼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는 일은 없습니다.

    자녀들끼리 싸움질하는 가정만큼 부모를 욕되게 하는 일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고린도교회에 영향력을 준 세 인물이 있었습니다.
    바울과 아볼로와 베드로입니다.
    한사람은 개척자이고, 한사람은 후임자이며 그리고 한사람은 초대교회의 가장 막강한 영향력을 끼치는 대표자입니다.

    씨를 뿌린 바울, 자라도록 성심을 다한 양육자 아볼로, 초대교회의 우상 베드로.
    이들은 고린도교회에 자신들의 족적을 남기려고 애쓰는 파벌주의자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린도교회는 분파가 이루어지고 만 것입니다.

    우리는 있는 듯 하면서도 없는 것처럼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나 하나 때문에 집안이 시끄럽다면 잘못된 것입니다.

    내 욕심을 죽이면 되는데 내가 희생하면 되는데
    나를 무시한다고 대접해 주지 않는다고
    우리는 화를 내고 미워하고 주변을 시끄럽게 합니다.

    우리는 선한 일에는 앞장 섬으로 있는 듯 하면서도 대접받는 일에는 보이지 않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서로 파벌로 싸울 때에 자기의 이름이 거론되는 것이 그렇게 부끄럽고 가슴아플 수가 없었습니다.

    그 가슴아픔을 13절 - 16절에서는
    내가 너희들과 같이 서로 파벌을 조장하는
    너희에게 세례 주지 않은게 다행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챙피한 일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읽는다)

    그리스도인에게 "십자가의 능력"이 약하여지면 항상 그 자리엔 다른 악한 것이 채워져 그것이 삶과 조직을 이끌어가게 됩니다.

    크리스천에겐 오직 '예수, 그리스도, 십지가' 이 세가지 이외에 더 중요한 것은 없었습니다.
    17절 "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주게하여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케하려 하심이니"

    사도바울은 너희가 "세례" 받은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17절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이 무엇입니까? 무엇을 복음이라고 합니까?
    "좋은 소식”“복된 소식”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정도만 알고 있다면 수박 겉 할기입니다.

    수박의 맛을 알려면 그 수박을 쪼개어 먹어 보아야 합니다. 먹어 보지 않으면 그 수박이 단지, 익었는지 모릅니다.

    복음이 무엇입니까?
    로마서 1장2절에 보면
    ‘이 복음은’이라고 시작합니다. 그리고 2절 중간에는 ‘그의 아들에 관한 것이라’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끝은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마칩니다.
    그러니까 복음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소식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이 무엇이냐 라고 누가 물어보면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다.”라고
    하면 99점입니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가 어떻게 되었는데? 라고 상대방이 의문이 생길 때에
    예수 그리스도 께서 우리를 살리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셨는데 그것을 믿으면 우리도 그렇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면
    그 설명은 복음에 대한 100점 자리 설명입니다

    잘된 음식에 양념을 하듯이 "예수 그리스도" 위에다 "십자가" 사건을 붙이면 아주 훌륭하고 완벽한 복음이 됩니다.

    1) 예수라는 이름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2) 그리스도라는 이름은 이 일을 하기 위해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을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3)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은 죄의 용서와 형벌이 이미 치뤄졌습니다.
    그리고 그 분은 죽었다가 다시 부활하였습니다.
    이것을 믿고 죄를 회개하는 사람은 죽지 않고 영원히 살 수 있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핵심이 되는 진리로서 성경 66권은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는 바늘에 실이 가듯이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는 항상 같이 갑니다.
    십자가 없는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할 수 없습니다.

    주요한 것은 십자가는 궁극적으로는 영광이지만 현실에서는 희생의 의미입니다.
    그것을 깨닫고 실천 하는 사람이면 참된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 사람입니다.

    이제 복음의 개념을 머리 속에 꽉 넣고 이것을 믿고 실천하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어느 회사에서 신입 사원을 채용하고 있었습니다.
    회사 측에서는 지원자의 이력서와 학교 성적만 가지고 채용 여부를 가리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회사는 한 가지 문제를 냈습니다. 소금과 설탕을 앞에 놓고 어느 것이 소금이고 어느 것이 설탕인 것을 말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지원자들은 책상 위에 놓인 것을 유심히 보았습니다. 그러나 소금도 희고 설탕도 희기 때문에 잘 알아 맞추지를 못했습니다. 그러나 한 지원자는 달랐습니다. 그는 앞에 놓인 것을 좀 보고 있더니 그 중 하나를 찍어 먹었습니다. 맛을 본 다음 이것이 소금이고 저것은 설탕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지원자는 말할 것도 없이 그 회사에 채용되었습니다.

    무엇이 소금인지, 무엇이 설탕인지 알려면 먹어 보아야 합니다.
    복음도 이와 같습니다. 복음이 무엇인지 알려면 내가 직접 체험해 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추상적이고 표면적인 이야기만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위대한 바울의 삶을 알 듯이
    1)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에 감격하고
    2)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양보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나로 하여금 복음에 대한 열정을 약화시킨다면 어떤 세상일도 것도 뒤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십자가지는 삶을 포기하게 하는 어떤 세상 것도 과감히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시작은 쉽지만 갈수록 점점 힘드는 일이 있는가 하면
    시작할 때는 힘이 들지만 갈수록 쉽게 풀려지는 일이 있습니다.
    1)우리의 인생도 살면 살수록 어려운 것입니다.
    사람은 이 땅에 육체를 입고 나서 어린 시절과 유년 시절, 청년시절 까지는 재미있습니다, 아름답습니다.
    (롯데 월드 봄날이 가면 청춘은, 사랑은 아름다운 것이다. )
    그러나 장년 시절 노년 시절을 보내기 까지 인간의 생애는 살아갈수록 힘든 삶입니다.
    노년이 되어서 편안할까 하면 여러 가지 질병으로 자식들의 여러 가지 문제로 갈수록 어려움을 느낀느 것입니다.

    또 한가지 마라톤도 뛰면 뛸수록 어려운 것입니다.
    마라톤의 시작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끝까지 달리는 것은 쉽지가 않습니다.
    해설가들의 말에 의하면 전체 42키로미터 구간 중 30킬로미터 지점에 이르면 인간의 육체에 한계가 온다고 합니다.

    그때부터는 정신력으로 뛰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정신력도 강한 훈련이 뒷받침 될 때만 가능한 것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험난한 인생길을
    마라톤 주자가 정신력으로 달리듯이 우리는 예수의 정신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십자가를 자랑하고 십자가의 능력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십자가는 그리스도의 상징이요 그러므로 기독교에 십자가를 자랑하는 종교입니다.

    요즘 비행기 사고가 많이 나고 있습니다.
    미국 펜실베니아 주 어느 지방에서 경 비행기가 비행을 하다가 건물 위 어떤 물체와 부딪혀 추락을 했는데 그 비행기가 폭발하는 바람에 건물 안의 사람들까지 많이 죽었습니다.
    그런데 '사고의 원인은 바로 철탑 십자가였습니다. 그러나 사고가 나던 날밤 그 십자가는 불이 꺼져 있었습니다'
    여러분 불 꺼진 십자가는 오히려 해를 기칠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심령에는 십자가 불이 켜져 있어야 합니다.
    십자가 불이 꺼진 심령, 가정, 교회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자랑하는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모든 것을 이겼습니다.
    신앙생활은 얼마나 했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신앙생활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하는 자세로 예수를 믿더라도 분명하게 확실히 믿으시기 바랍니다.
    불꺼진 십자가는 오히려 불신자들이 교회로 오는 길을 막는 것입니다.

    이 십자가는 모든 믿는 자들에게 능력이 됩니다.
    18절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믿는 자에게 능력이라고 했습니다.
    십자가가 능력을 받는 성도가 되도록 믿으시기 바랍니다.

    솔제니친은
    구 소련의 작가로 체제를 비방하는 반역자로 수용소에서 갖은 고문을 당하며 고생을 하다가 서방으로 망명한 사람입니다.
    솔제니친의 감옥생활에 관한 이야기를 보면 그는 특별 범죄자로 구분되어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의 정신력과 신념 모두 탈진했을 정도로 고생을 하는 솔제니친에게 한 사람이 다가왔습니다. 바닥에 십자가를 그어주며 그것을 바라보라고 한 후 갔다고 합니다. 그래서 솔제니친이 그 십자가를 한참 주목했다고 합니다.
    솔제니친은 그 사나이가 바닥에 그어준 십자가를 바라보는 순간에 솔제니친에겐 알지 못하는 힘이 일어났다고 했습니다.
    이 십자가가 그에게 참 자유와 능력이 되는 것을 그때 깨달았다고 합니다.
    우리가 고통에 처할 때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능력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것을 붙잡고 그 앞에 나아가는 믿음으로 십자가의 능력이 삶에 임하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는 어디서 힘을 구합니까?
    기도하는데서 십자가의 능력을 받습니다.
    어떤 사람을 보면 자기 문제를 참 진지하게 대화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한 시간도 좋고 두 시간도 좋고 남에게 자신의 문제를 진지하게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문제를 붙잡고 하나님 앞에 5분도 기도하지 않습니다.
    사람 앞에선 자신의 문제를 내 놓고 이야기 하면서 하나님 앞에는 진지하게 기도하지 않는 그 사람에게 과연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능력이 나타 될까요?
    사람 앞에 한 시간 얘기했다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두 시간을 부르짖어도 부족한데 거꾸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순교자 주기철 목사님은
    그의 설교 중에 '십자가를 바로 지기만 하면 그 십자가가 당신을 지고 갈 것'이라는 비장한 한 마디 말을 남기셨습니다.
    오늘 여러분들의 사명이 힘들고 고통스럽습니까?
    십자가를 바로 지십시오. 바로 지는 십자가는 주께서 도우십니다.
    주께서 힘을 주십니다. 여러분에게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능력이 되기를 바랍니다.

    18절을 보면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합니다.

    십자가의 도는 멸망하는 자와 구원얻는 자를 가르는 것입니다.
    미련한 자와 구원얻는 자를 가르는 것이 십자가의 도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약삮바르게 지혜를 추구하며 인간의 행복을 찾는 이방인의 눈에 십자가의 도는 연약한 것이고 미련한 것입니다.

    그러나 오직 부르심을 입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며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세상의 지혜와 학문으로는 사람을 살릴수 없지만
    하나님의 복음과 십자가의 능력은 세상을 살릴 수 있는 길입니다.

    십자가의 능력이 27-28절에 나타 남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은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저와 여러분들이 바로 그리스도 밖에 있었을 때 우리는 심히도 미천한 자이었습니다.
    어둠의 세력에 휩싸여서 갈 바를 몰라 방황하는 백성이었습니다.
    공중의 권세잡은 자, 사신우상에게 절하며 복을 빌었던 미련한 자식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예수안에서 부르셨습니다.
    십자가의 도, 전도의 미련한 방법으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부르신 이유는 여러분을 택하셔서 자신들이 강하고 지혜롭다고 말하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셨습니다.

    세상을 살 때 더 이상 미련하고 연약한 인생으로 살지 않고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발휘하며 살도록 은총을 베푸셨습니다.
    이 모든 것이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바울은 말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 외에는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긴다고 했습니다. 이전의 자신의 모든 가문과 학식과 능력을 배설물로 여긴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람에 따라서 어떤 사람은 하늘을 나는 새처럼
    세상을 내려다 보기도 하고 또 다른 세상을 멀리 바라보는 새와 같은 눈을 가진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땅 위에만 기어다니면서 항상 눈앞에 있는 현실과 장애물만을 바라보는 벌레와 같은 눈을 가진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높은 하늘을 나는 새의 눈을 가진 사람은 항상 멀리 바라보면서 오늘을 삽니다.
    반면에 땅 위에만 기어 다니는 벌레의 눈을가진 사람은 항상 눈앞에 있는 현실과 장애물만을 바라보면서 오늘을 삽니다.

    오늘 우리는 어떤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 어떤 눈으로 세상 문화를 바라보며 살고 계십니까 ? 새의 눈으로 세상 문화를 바라보며 사십니까 ? 아니면

    내가 어떤 눈으로 바라 보느냐에 따라서
    내 인생이 달라지고 삶의 내용도, 삶의 의미도, 삶의 목적도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민수기 21장을 보면, 불뱀과 놋뱀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백성들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며 탄식을 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며 탄식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불뱀들을 백성중에 보매어 물게 하시므로 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또 많은 사람들이 죽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에게,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하므로 범죄하였사오니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 불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라고 간청을 합니다.
    이에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모세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은 놋으로 불뱀을 만들고 장대위에 그것을 매달고 바라보라는 것이었습니다.
    불뱀에 물린 백성들에게 기상 천회할 구원의 방법이 제시된 것입니다.
    민수기 21장 9절에 보면 "모세가 놋뱀을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마다 놋뱀을 쳐다본즉 살더라"고 했습니다.

    그때 그것을 어리석고 미련한 짓으로 여긴 사람들은 다 죽었습니다.
    그러나 순수한 마음과 믿음의 눈으로 장대에 높이 달린 놋뱀을 바라본 사람들은 다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 놋뱀사건은 후에 있을 십자가 사건의 예표였던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지혜로 세상을 바로 보며 분별했던 지혜의 눈을 가졌던 사람이 있습니다.
    구약 창세기서에 나오는 아브라함입니다.
    가나안 땅에 가뭄이 들어 애굽으로 이주하였던 아브라함과 롯이 애굽에서 많은 재물과 가축들을 모아 가지고 다시 가나안 땅 지역으로 돌아왔습니다. 돌아와서 그 땅에 기거할 때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가나안은 오랜 세월동안 가뭄 가운데 있었기 때문에 물이 부족하였고, 또 가축들이 먹을 물과 풀이 부족했던 것입니다.
    그러니 서로 많은 가축이 늘어나면서 자기의 양떼들에게 물과 풀을 먹이려고 하면서 다툼이 일어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러한 문제가 발생하자, 아브라함은 결심을 하게 됩니다.
    "나와 조카 롯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가서 물과 초지를 찾고 경작할 땅을 얻어야 하겠구나"하고 중대한 결심을 내립니다.

    그래서 창세기 13장 8-9절에 보면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골육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말자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이렇게 아브라함이 먼저 조카 롯에게 선택권을 주자, 롯은 마다하지 않고 얼른 먼저 주변의 땅을 살핍니다. 롯은 요단 동편의 땅을 바라보았습니다. 그 땅은 참으로 좋은 땅이었습니다. 그 땅은 "여호와의 동산과 같고 애굽 땅과 같다"고 합니다.

    롯은 결국 소돔 땅에까지 들어가게 됩니다. 롯은 당시 소돔이 죄악에 깊이 타락되어 있음을 알고도 그 곳을 택했습니다. 그의 눈에는 풍요롭고 세속적인 물질만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롯의 불신앙 때문입니다.

    롯은 이기심과 욕심에 눈이 어두워서 현실함 추구했지 하나님을 잘 섬기고 하나님을 잘 믿고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는 지혜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오직 눈 앞에 보이는 자기 이기심과 자기 욕심에 사로잡혔던 롯 때문에 가족들이 악의 상징인 소돔 땅에서 유황불로 심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나가는 아브라함은 어떻습니까 ?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 보았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현실과 환경을 포기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창세기 13장 14절 이하에 보면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 남북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내가 네 자손으로 땅의 티끌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고 축복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브라함처럼, 현실과 환경만을 보기보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바라보는 믿음의 눈을 가진 지혜로운 사람들이 되셔서 땅의 모든 사람들의 복의 근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십자가는 나의 이야기입니다. 십자가는 곧 나를 위한 십자가인 것입니다.
    십자가 때문에 내가 살게 되었고,
    십자가 때문에 내가 영생을 얻게 되었고,
    십자가 때문에 내가 영원한 행복의 길을 찾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깨닫고 십자가를 바라보는 지혜가 구원을 알게 하는 눈입니다.

    사도바울은 "내가 평생에 자랑할 것이 하나 있다면,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화목한 사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웃과의 관계도 화목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내 마음에 평화가 넘쳐납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승리하게 됩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내세의 소망이 있습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믿음이 성장합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환난도, 핍박도, 고난도 이기게 됩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믿고 십자가를 사랑하고 십자가를 바라보고 의지해야 합니다.
    십자가는 우리로 하여금 더 넓은 세계를 바라보며 살게 합니다.
    저 높은 곳을 바라보며 살게 합니다.

    우리 모두 십자가를 통해서 넓은 시야와 높은 시야, 넓은 마음, 넓은 행동 반경을 가지고 십자가를 자랑하며 십자가를 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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