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너와 네 집이 섬길자를 택하라 2002-01-06 18:48:57 read : 12907
2001. 9. 9. 여호수아 24:14-15
I. 선택
저희 가정은 부부싸움을 안 한다기 보다 잘 못하는 편입니다. 언제나 한쪽에서 쉽게 양보를 해 버리기 때문에 싸움이 잘 안됩니다. 그런데 백화점이나 시장을 가면 꼭 한번씩 싸움을 했습니다. 저는 물건을 고르는데는 질색이고 아내는 이것 저것 구경하고 고르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언젠가부터 제가 아내를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내는 처녀시절 이 남자 저 남자 골라 보지 못하고 일찌감치 제 눈에 찍혀 시집을 왔습니다. 그래서 물건이라도 골라보고 싶은 것일 게라고 엉터리 심리를 만들어 냈습니다. “그렇다면 자! 아내로부터 선택의 기쁨을 빼앗지 말자, 실컷 고르게 해주자.” 이때부터 어쩌다 한번씩 아내와 함께 가는 시장 나들이가 기쁨이 되었습니다.
사실 인생이란 선택의 연속입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어느 옷을 입을까? 어떤 음식을 만들어 가족들을 기쁘게 해 줄까? 어느 학교에 진학하여 무엇을 전공할 것인가? 결혼상태의 선택, 직업의 선택, 교회의 선택 등 -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갈림길에서 선택을 잘하고 못하는데 따라 그 인생이 행복할 수도 있고 불행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러시아가 개방되기 오래전 미국으로 망명을 했던 스타린의 딸 스페트라나 여사가 기자회견을 했습니다. 기자들이 “미국 생활에서 가장 적응하기 어려운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대답하기를 “선택해야 하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러시아에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이 모든 것이 결정되어 하달되는데 여기에서는 매일 매일의 삶을 자신이 선택하고 자신이 책임져야 하는 일이 적응하기 어려운 일이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선택은 언제나 가치의 문제입니다. 지금 여러분의 가정에서 혹은 여러분이 자라난 가정에서 최고의 가치는 무엇입니까? 부자가 되는 것, 가정의 행복, 먹는 것(요리연구, 도시내 모든 식당통달) 가치가 뭔지 모르겠다?
II. 하나님을 선택하라
전 세계적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가져왔던 타이타닉이라는 영화를 기억하실 겁니다. 1912년 영국 사우샘프턴 항에서 출항하여 뉴욕으로 향하는 처녀 항해중 1912년 4월 14일밤 11시 40분이었습니다. 뉴펀들랜드 해역에서 타이타닉호는 빙산과 충돌하여 2시간 40분만에 침몰하였습니다.
이 사고로 승선하고 있었던 2,208명 중 695명만 구출되었습니다. 그러고 나머지 1,513명의 희생자를 낸 사상 최대의 해난 사고였습니다. 실제로 있었던 사건을 각색하여 영화하였던 것입니다. 이 영화를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감명을 받았습니다.
한 사람이라도 더 살리기 위하여 보트에 사람들을 실어주려고 노력하는 선원들, 침몰하는 배를 끌어안고 마지막까지 배의 키를 붙들고 함께 침몰하는 함장의 모습. 특별히 사랑하는 여인을 위하여 마지막 목숨을 내어놓고 그 여인을 살리는 주인공의 모습. 이러한 내용들을 통하여 사람들은 많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 내용들은 거의 대부분이 각색된 내용입니다. 영화이기 때문에 각색된 내용들입니다. 특별히 사랑하는 여인을 살리기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내놓은 주인공의 이야기는 100% 각색된 것입니다. 먼저 저는 여자 성도 여러분에게 그런 남자가 없다는 것을 알려 드립니다. 괜히 그 영화에 나오는 그런 스타일의 남자에 대하여 미련을 갖지 마십시오. 그러한 남자는 없습니다. 그러한 남자가 없기 때문에 여자들은 그 영화에서 나오는 주인공에게 감동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영화에서나 실제로 각색되지 않고 실제로 있었던 내용이 있습니다. 그것은 끝까지 침착하게 사람들의 마음을 안정시키며 그리고 찬양가사를 통하여 예수그리스도를 전했던 밴드 담당 웰레스라는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타이타닉호가 바다 속으로 침몰할 때 선상에서 마지막까지 찬송을 연주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안정시키며 예수그리스도를 전했던 웰레스의 이야기는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밴드 책임자인 웰레스는 전도하기 위하여 타이타닉이라는 배를 자진해서 탔습니다. 그 시대에 가장 호화로운 배, 가장 튼튼하게 만들었다던 배. 하나님도 이 배를 침몰시킬 수 없다고 장담한 타이타닉호, 웰레스는 이 배를 타고 바다를 횡단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자진해서 그 배에 탄 악장이었습니다.
배가 바다 한 가운데서 침몰 중에 있었을 때, 모든 사람들이 죽음 앞에서 우왕좌왕하며 어찌 할줄을 모를 때 그는 자기 악기팀 멤버들을 마지막까지 격려하면서 찬송을 연주했습니다.
♪ 내 주를 가까이 하려함은 십자가 짐 같은 고생이나 내 일생 소원은 늘 찬송하면서 주께 더 나가기 원합니다.
웰레스 형제는 이 음악을 들려주면서 소리쳤습니다. "여러분 주 예수그리스도를 믿으십시오. 우리 인생 마지막 우리가 선택하여야 할 분은 주 예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마지막 소망은 그분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으십시오!" 배 안에서 죽어가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주님을 선택하라고 외쳤습니다. 그리고 타이타닉 배안에 있었던 수많은 사람들은 배가 침몰하기 직전에 웰레스 형제가 외쳤던 예수그리스도를 선택하고 웰레스 형제와 함께.
♪ 내주를 가까이 하려함은 십자가 짐같은 고생이나 내 일생 소원은 늘 찬송하면서 주께더 나가기 원합니다.
찬송을 부르며 배와 함께 침몰했습니다. 인생의 마지막 순간 인생이 선택할 수 있는 마지막 선택은 창조하신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마지막 죽음 앞에서 인간이 무엇을 선택하겠습니까? 돈을 선택하겠습니까? 명예와 권세를 선택하겠습니까? 아닙니다.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입니다. 마지막 죽음 앞에서 돈을 선택하라고 아무리 외쳐보십시오. 돈을 선택할 사람이 있겠습니까? 마지막 죽음 앞에서 권세나 명예를 선택하라고 아무리 외쳐보십시오. 권세나 명예를 선택할 사람도 없습니다.
누구나 인생의 종착점에 서고 보면 최고의 가치는 하나밖에 없습니다. 생명입니다. 구원입니다. 영생입니다. 하나님입니다. 천국입니다.
III. 본문의 상황
오늘 본문은 여호수아서 마지막장 - 그중에서도 클라이막스에 해당하는 부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정복한 가나안 땅은 전쟁이 그치고 이곳 저곳 마을이 형성되고 도시가 형성되며 안정감을 찾아가고 있었습니다. 창고에 곡식이 쌓이고 아랫목이 따뜻해져 오면서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물론 공적으로는 야훼 하나님을 섬기고 있었지만 계속되는 전쟁에서는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있었던 애굽의 문화와 우상들에 대한 그리움이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또 한편에서는 가나안의 새로운 문화를 접하면서 이방문화와 우상에 대한 묘한 호기심과 매력까지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을 향하여 여호수아는 인생의 석양에서 그의 유언이라고 할 수 있는 마지막 설교를 외치게 됩니다. 한 마리 새의 마지막 울음소리가 더욱 구슬프듯이 한 시대를 이끈 지도자의 마지막 절규는 더욱 힘이 있었고 호소력이 있었습니다.
철부지를 두고 죽게된 한 아버지의 유언처럼 철없는 백성을 두고 떠나는 지도자 여호수아서 안타까움이 서려있습니다.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열조가 강 저편에서 섬기던 신이든지 혹 너희의 거하는 땅 아모리 사람의 신이든지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수24:14)
이 말을 우리 말로 해보면 이렇습니다. 집 한칸이라도 마련해 보겠다고 아둥바둥 할 때는 몰랐던 신앙의 위기가 집 한 칸이라도 준비하고 집안의 가구도 이럭저럭 준비가 되면서 찾아 올 수 있습니다.
어느 사회학자는 아파트 문화의 위기를 익명성의 유혹과 편안이 유혹이라고 요약했습니다. 될 수 있는대로 자기를 알리지 말고 혼자서 숨어살고 싶은 유혹과 전화 한 통으로 만사를 끝내는 생활에 익숙해져서 심지어는 신앙생활도 편안하게 숨어서 하고자 하는 유혹이 있다는 얘깁니다.
교회적으로도 그렇습니다. 우리교회도 금년 6월 창립 10주년을 보냈습니다. 교회가 어려울 때는 몰랐던 위기와 유혹이 교회가 부흥되고 안정되면서 찾아올 수 있습니다.
IV. 우상
이런 상황속에서 여호수아의 외침에 귀를 기울여 보십시다. 14절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성실과 진정으로 그를 섬길 것이라 너희의 열조가 강 저편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제하여 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
여기 우상은 여호수아 당시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도 여전히 우리곁에 있습니다. 우상은 원시인들에게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우주시대, 컴퓨터시대, 지구촌시대 속에서도 여전히 각처에 도사리고 있습니다. 우상은 예수 믿기전에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은 후에는 오히려 더욱 교묘히 나를 유혹할 수 있습니다.
워른 위어스비는 현대인의 두 가지 우상을 날카롭게 지적한 바가 있습니다.
① 이루어진 일의 공로를 자기 자신에게 돌릴 때 자기가 우상이 되고,
② 하나님이 주신 선물을 하나님보다 귀하게 여길 때 그 선물이 우상이 된다고 했습니다.
옳습니다.
첫째는 자기 우상입니다. 인생이 힘들고 고통스러울 때, 만사가 부족하고 모자랄 때, 우리 인생이 비바람에 시달려 뿌리부터 흔들릴 때,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 저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제발 저를 한 번만 도와주십시오." 하나님의 도우심과 사랑을 구했고 그분께 매달려 능력을 구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내 삶속에 성공이 찾아오고 안정이 찾아오기 시작했을 때 기도를 망각합니다.
계룡대에 있는 군인교회에 몇 번 집회? 진급심사 때가 되면 갑자기 새벽기도회, 철야기도회 자리가 넘친답니다. 그러다가 발표가 끝나고 나면 텅텅 빈다고. 목사님 - 심사가 두 달에 한번씩은 해야 할까 봐? 진급! 감사 기도회!
"보라! 나는 얼마나 위대한 일을 이루어 놓았는가?" 자기 삶의 모든 영광을 자신에게 돌리기 시작합니다. 바로 이 순간부터 그토록 사랑스럽던 '나'라는 존재는 우상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하나님의 자리에 우뚝 서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물론 당신이 고귀한 땀을 흘려 사업을 이루었고 성공을 했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잊어버린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건강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땀을 흘릴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내게 지혜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창조적인 아이디어가 가능했습니다.
둘째는 공로의 우상, 선물의 우상입니다. 돈을 모았을 때 그 돈만 귀중하게 보입니다. 그 순간부터 그 돈은 우상입니다. 바닥을 헤치고 이름을 날렸습니다. 그 순간부터 그 이름은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내가 얻은 삶의 편리한 조건들 아파트, 자동차, 그것들이 내 삶속에 우상이 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기적적인 도움으로 가나안 땅에 도착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에 대한 유혹을 물리치지 못했다는 것은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줍니까?
오늘까지 일마다 때마다 하나님의 기적을 먹고 살아온 그리스도인들이 때로는 자기 우상에 빠지고 때로는 환경이라는 우상에 빠져서 허우적거릴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 아닐까요? 하나님만 바라보던 당신의 그 맑고 순수한 시선을 빼앗은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만 사랑하던 그 고결한 가슴에 큼직히 자리잡은 그 우상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V. 그러므로
"그러므로" - 하나님이 인도, 기적, 보호!
19세기 스웨덴이 남긴 조각가 밀레스의 작품 중 - 하나님의 손 : 크고 우람한 손바닥 안에 작고 초라한 한 인간은, 인간이 아무리 크고 위대해도 하나님 손바닥 안에 있다. 하나님의 보호안에 있을 때 평안.
오늘 본문 14절 처음과 마지막을 연결해 보면 이렇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우상을 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 본문은 "그러므로 이제"는 이라는 말로 시작이 됩니다.
「가나안 땅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시다. 광야에서 너를 먹이고 입히고 보호해 주신 분이 하나님이시다. 네가 가진 모든 행복의 조건을 하나님이 주셨다. "그러므로" 이제 너는 하나님만 섬겨야 한다.」이것이 본문의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호흡을 주셨습니다. 삶의 능력을 주셨습니다. 그분이 당신을 축복했습니다. 당신이 누리는 모든 삶의 풍요와 평안을 하나님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마땅치 않습니까?
이어지는 15절 말씀은, "그런데도 불구하고 너는 왜 하나님과 우상사이에서 갈등하며 머뭇거리느냐 너희 섬길자를 오늘 택하라" 촉구하고 있습니다. 갈등, 우왕좌왕 - 그것은 인생을 무력하게 만듭니다. 두 마음 세 마음을 가지고는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습니다. 선택과 결단, 오직 한 마음, 여기에 힘이 있고 용기가 있습니다.
1천명이 힘을 모아 줄을 당겨도 서로 다른 방향으로 당기는 줄 당기기를 하면 5m도 끌고가기가 힘이 듭니다. 힘은 언제나 일직선에 있습니다. 기둥을 봐도 그렇습니다. 굽은 기둥은 아무리 굵어도 쓸모가 없으나 비록 가늘어도 곧은 기둥은 힘을 낼 수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의 마음 또한 확실한 선택과 결정이 있을 때 강한 힘을 낼 수가 있습니다.
VI. 세겜
신앙은 사실 결단에 의해 성장되어 갑니다. 본문 여호수아의 마지막 설교가 외쳐진 장소는 세겜이란 곳입니다. 성경에서 세겜은 언제나 선택과 결단의 장소 그러나 그 선택이 언제나 옳은 선택이어서 이스라엘이 축복받은 장소가 세겜이었습니다. 그런점에서 교회는 세겜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른 선택을 배우는 곳입니다. 옳은 결단을 하게 하는 곳입니다. 우리 한소망교회가 여러분 모두의 세겜 땅이 되시길 바랍니다.
① 어떤 사업을 시작해 볼까? 고민?
② 갈길을 알지 못하여 방황하다가도?
※ 인생의 방황, 심판의 방황
성경에서 세겜이란 장소는 에발산과 그리심산 사이에 위치한 유명한 계곡입니다.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 제단을 쌓고 하나님을 만난 곳입니다. 또한 야곱이 메소포타미아의 방황에서 돌아와 우상을 땅속에 파묻고 하나님 앞에서 새로운 삶을 살기로 작정했던 곳이 세겜입니다. 이곳에 요셉의 뼈가 묻혔고 이미 오래전 여호수아는 이곳에서 율법책을 낭독하여 백성들의 순종을 요구한 바가 있었습니다. 이처럼 세겜 땅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올바른 결단이나 선택을 할 때 섰던 장소입니다.
묻습니다. 여러분은 인생을 살아가던 어느날 이 세겜에 서보신 경험이 있으십니까? "과거에 저주스런 삶을 집어던지고 이제는 하나님만 섬기기로 작정합니다." 하나님 앞에 결단을 했던 경험이 있으십니까? 못된 우상과 끈질기게도 따라다니던 유혹과 잘못된 습관을 집어던지고 바로 살아보겠다고 다짐했던 결단의 자리가 있으십니까? 누구나 한 두 번은 세겜이 있어야 축복된 인생을 살 수가 있습니다. 사랑받는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VII. 결단의 대상
여호수아는 이 세겜 골짜기에서 결단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너희 섬길자를 오늘 택하라” - 언젠가 세계 청소년 대회에서 현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이 가장 괴로워하고 있는 문제가 무엇인가를 논의한 적이 있습니다. 오늘 젊은이들의 가장 큰 고민거리는 놀랍게도 자기 목숨과 젊음과 정열을 바칠 수 있는 절대가치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인생을 바칠 수 있는 대상, 젊음을 불살라 드릴 수 있는 대상, 내 삶을 던져 헌신할 수 있는 그런 대상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점에서 바울의 고백은 얼마나 행복한 것입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위하여 미쳤다.”
미국의 “행복한 젊은이들의 모임”의 가장 기본적인 복장은 모자를 쓰는 것이고, 그 모자엔 붉은 글씨로 이렇게 쓰는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미쳤다.” 그리고 모자 뒤에는 이렇게 씁니다. “그러면 당신은 누구를 위하여 미쳤는가?”
여러분!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주신 사명과 비젼을 위해 - 그분 - 예수를 위하여 미쳐보지 않으시렵니까? 나를 구원하신 그분 앞에 당신의 삶을 던져보지 않겠습니까? 전능하신 하나님을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내 삶에 자상한 애정과 관심을 가지시고 나를 돌보고 간섭하시는 그분을 위해 당신의 인생을 불살라 보시지 않으시렵니까? 무력한 것을 선택하면 당신의 삶도 무력해질 수 밖에 없고 당신이 전능자에게 붙들리면 당신은 능력있는 사람이 됩니다. 당신이 누구를 섬기는 가에 따라서 당신의 인생관이 달라지고 세계관이 달라집니다. 너희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교회를 선택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여러분! 행복하게 섬길 수 있는 한 교회를 선택하기 위해 고민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하나님을 선택하는 일은 절대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지교회를 선택하는 일은 절대적인 것이 못됩니다. 형편에 따라 언제나 옮길 수 있는 것이 교회입니다. 그때마다 각자의 선택기준이 있고 취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좋은 교회를 선택하는 일은 신앙을 선택하는 것 만큼이나 중요하고 배우자를 선택하는 것 만큼이나 신중한 것입니다. 여기에 교회 선택의 어려움이 있는 것이지요.
한 교회학 신학자는 교회선택의 기준을 세 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영성, 둘째는 역사성, 셋째는 가능성입니다.
여기 영성이란, 말씀이 잘 맞아야 하고 교회가 추구하는 방향성이 신학적으로 성경적으로 바르고 옳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역사성이란, 한 시대에 반짝거리는 교단을 선택하지 말고 뿌리가 있고 오고 오는 역사에 영향을 미치며 남을 수 있는 건전한 교단을 선택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능성이란, 폐쇄된 교회가 아니라 개방적이고 발전 가능성이 있는 교회를 의미합니다.
그런점에서 우리 한소망교회는 좋은 교회라고 믿습니다. 먼 훗날 우리가 한소망교회를 선택한 것이 행복하고 자랑스럽고 영광스러울 수 있기를 원합니다.
VIII. 오늘
너희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선택과 결단의 기회가 언제입니까? 내일이 아니요 내년이 아니요 오늘입니다. 오늘이란 말은 여러분이 교회에 찾아올 때마다 언제나 오늘이 되어서 은혜가 되고 결심이 생기고 능력이 주어진다는 뜻입니다. 또 오늘이란 그 긴박성을 강조한 말씀입니다.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여기에 선택의 긴박성이 있습니다.
지옥에서 금메달을 딴 마귀가 "차차마귀"라고 하지 않습니까? "서두를 것 없다 천천히 래라 얼마든지 좋다. 그러나 내일 해라." "차차믿고 차차하라"는 차차 마귀가 일등을 했답니다.
미국의 유명한 지도자 케네디는 그가 대통령에 당선된 후 아이젠 하워 전대통령을 찾아가서 자문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때 아이젠 하워는 젊은 새 대통령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당신의 임무는 결단해야 할 때에 결단하는 것이요.”
그렇습니다. 우유부단하거나 우왕좌왕하는 지도자는 나라를 살릴 수 없고 국민의 신임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인생의 기회는 우리가 결단하기까지 언제나 기다려 주는 것이 아닙니다. 신속하게 바른 결단을 하는 사람만이 기회를 포착해서 남을 앞서가는 지도자가 될 수 있습니다. 특별히 오늘 우리시대는 결단의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너희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고 선포한 여호수아는 주저하지 아니하고 자기의 선택을 고백합니다.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우리의 삶은 선택만큼 행복하고 선택만큼 삶의 질이 높아집니다. 나무나 돌을 선택한 인생의 가치는 나무나 돌의 가치만큼만 높아질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선택한 사람은 하나님만큼 높아진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바로 그 높으신 분을 위해 내 심장과 삶을 불사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하고 기쁜 일입니까?
언제나 우리는 이렇게 고백하십시다. "나와 내 집은 오직 하나님만 섬기겠다."
아침마다 일어나 이 결단을 확인하십시다. 이 교회에 올 때마다 당신의 결단을 다시 확인하십시오. "영원토록 하나님만 선택하리라."
존 번연의 갇혀있던 네드포드 감옥은 참으로 괴로운 곳이었습니다. 불결하고 음침하고 습하고 고문이 있어 견디기 힘든 곳이었습니다. 하루에도 몇번씩 신앙의 절개를 굽히고 나가고도 싶었습니다. 수없는 유혹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존 번연은 그때마다 새로운 결단을 했습니다. “오늘 비록 내 눈썹에 이끼가 끼더라도 나는 주님을 버리지 않겠다. 비록 내 눈썹에 이끼가 자라나도 나는 하나님만 섬기겠다.” 여기서 존 번연은 천로역정이라는 위대한 책을 만들어 냈습니다.
당신은 오늘 누구를 섬기기로 결단하셨습니까!
IX. 바른 선택엔 보상이 따른다
잘못된 선택에는 언제나 그만큼의 댓가를 지불하게 되어 있고 좋은 선택에는 언제나 그만큼의 좋은 보상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세계를 둘러보면, 일찍부터 하나님을 선택했던 나라들과 하나님을 버린 나라들 간에 엄청난 정신적, 경제적, 문화적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GNP가 높은 선진국들은 대개가 기독교 국가들입니다.
여러분 노르웨이라는 나라를 아실 것입니다. 그 나라는 세계에서 사회 보장제도가 가장 잘된 나라입니다. 그런데 이 나라의 조상들이 누구였는지 아십니까? 그들의 조상은 바이킹입니다. 배를 타고 남의 나라에 가서 보화를 강탈하고 사람들을 잡아다가 노예로 삼고 사람을 죽이고, 나쁜 짓이란 나쁜 짓은 다 하는 민족이었습니다. 쉽게 말하자면, 해적이었습니다.
바이킹의 총 우두머리가 왕입니다. 그 왕에게는 다른 나라에서 잡아 온 수 많은 노예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수 많은 노예 중에 유독 어느 한 어린 여자노예가 있었는데, 그 어린 여자노예는 늘 얼굴이 밝고, 입으로 무엇인가 종알종알 하면서 다니는 모습을 왕이 발견하고 그 아이를 불러서 물어봅니다. "너는 부모님도 보고 싶지 않니? 너는 여기 노예로 있는게 무섭지도 않니?" 소녀의 눈에서 눈물이 글썽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부모님도 보고 싶고 집에도 가고 싶습니다. 그러나 저는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아가기에 늘 그 하나님과 동행하며 기쁨으로 기도하면서 살아가고 또한 이 곳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주님을 소개하면서 살아갑니다. 왕도 하나님을 섬기세요. 왕도 주님을 믿으세요." 전도합니다.
그 어려운 환경과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선택하며 기쁨으로 살아가는 그 어린 소녀에게 바이킹 왕이 전도 받아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왕이 전 바이킹에게 선포합니다. '앞으로 우리 민족은 남의 나라에서 도적질하고 죽이고 노예를 붙잡아오는 것을 그만 한다.'
그러나 그 밑에 있는 장수들이 반란을 일으켜 그 왕을 죽였습니다. 그러나 얼마 있지 않아 그 나라는 남의 나라에서 약탈하고 죽이는 일을 그만 두고 말았습니다. 이 나라는 예수님의 보혈을 상징하는 십자가가 국기로 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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