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소원 2002-01-29 13:05:58 read : 15371
시 : 119: 169~176
169 여호와여 나의 부르짖음이 주의 앞에 이르게 하시고 주의 말씀대로 나를 깨닫게 하소서
170 나의 간구가 주의 앞에 달하게 하시고 주의 말씀대로 나를 건지소서
171 주께서 율례를 내게 가르치시므로 내 입술이 찬송을 발할지니이다
172 주의 모든 계명이 의로우므로 내 혀가 주의 말씀을 노래할지니이다
173 내가 주의 법도를 책하였사오니 주의 손이 항상 나의 도움이 되게 하소
174 여호와여 내가 주의 구원을 사모하였사오며 주의 법을 즐거워하나이다
175 내 혼을 살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주를 찬송하리이다 주의 규례가 나를 돕게 하소서
176 잃은 양같이 내가 유리하오니 주의 종을 찾으소서 내가 주의 계명을 잊지 아니함이니이다
프랑스 파리의 한 수도원 입구에 돌비석이 하나 세워져 있는데, 이런 글이 쓰여져 있습니다.
" : 그 다음에, 그 다음에, 그 다음에" 라는 글입니다. 해설 없이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글귀입니다. 왜 이런 글귀를 돌비석에 새겨 놓았을까요? 거기에는 사연이 있습니다.
법대를 다니는 한 학생이 어렵게 공부를 하고 있었어요. 4학년 마지막 학기가 되었는데, 등록금을 구할 길이 없었어요. 백방으로 노력해 보았지만 구하지 못했어요. 생각다 못해 한 교회에 찾아가 신부님을 찾아 뵈었어요. 자기의 사정을 말씀 드렸더니, 그 신부님이 한 다발의 돈 뭉치를 내어 주면서 "자네가 오기 바로 직전에 한 성도가 유용하게 써 달라고 돈을 맡기고 갔는데, 아마 하나님께서 이것을 자네에게 주라는 뜻인 것 같네" 하시면서, 세어 보지도 않고 뭉치 째로 주었어요. 이 고학생은 돈 뭉치를 건네 준 신부님이 너무 고마웠어요. 그래서 "고맙습니다!" 하고 인사를 하고 돌아서려는데 그 신부님이 불러 세웠어요. "잠깐만, 내가 자네에게 한 가지 물어봐도 되겠나?" "물어보십시오" "자네, 그 돈으로 무엇을 하려고 그러나?" "신부님, 당연히 등록금을 내야죠" "그래, 그 다음에는?" "공부를 해야죠" "공부, 공부 다음은?" "법대를 졸업해서 훌륭한 법관이 될 겁니다. 제가 어릴 때 너무나 고생을 했고, 불의가 이 세상에 판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정의를 실현하는 법관이 되겠습니다" "법관이 된 다음에는?" "돈을 좀 벌어야겠습니다. 그동안 너무 가난하게 살았거든요" "그 다음에는?" "장가를 가겠지요" 또 묻습니다. "그 다음에는?" 계속되는 신부의 질문에, 고학생은 뭔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으나 대답은 못하고 있었어요. 머뭇거리고 있는걸 보더니 신부님이 "그 다음에는 내가 대답하지!" "그 다음 자네는 언젠가 죽게 될 거야! 그리고 그 후에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거야! 이것을 꼭 기억하게!" 하시고는 고학생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이 고학생이 집에 돌아왔는데, 계속해서 그 질문이 생각이 나는 겁니다. "그 다음에는, 그 다음에는?" 책상 앞에서 책을 보고 있어도 그 소리가 들려와서 공부를 할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그 학기에 공부하던 것을 다 접어두고 수도원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리고 이 고학생은 역사에 남을만한 수도사가 되어서 일생을 그곳에서 마쳤습니다. 그가 평생에 좌우명으로 삼았던 이 "그 다음에는" 이라는 말을 비석에 써서 그를 기리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는!" 중요한 말입니다.
유명한 신학자 폴 틸레이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저서 'Ultimate Concern'에서 신앙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궁극적인 관심'이라고 얘기합니다. 신앙을 궁극적인 관심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 그리스도인은 어떤 사람인가에 대해, 궁극적인 관심에 붙들려 사는 사람이라고 그의 저서에서 얘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르게 표현하면, 그 사람의 최대의 관심사와 소원을 보면 그 사람이 신앙인인가 아닌가를 알 수 있다는 겁니다. 대단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우리는 겉모습만 보고, 그 사람의 신앙을 가늠할 때가 많습니다. 새벽기도를 나오는가 안나오는가, 주일 출석을 하는가 안 하는가, 교회에서 봉사를 하는가 안 하는가, 헌금을 많이 하는가 적게 하는가. 그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나 때로 겉으로 드러난 외적인 것이 내면적인 신앙을 반영하지 못할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돈을 바라면서도 열심히 새벽기도에 나올 수 있다는 겁니다. 이 세상의 물질적인 축복을 위해서 열심히 철야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명예를 위해서 기도할 수 있고, 성공 때문에 열심히 하나님 앞에 봉사하고 기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겉으로 드러난 활동이 문제가 아니라, 그 사람 중심에 있는 궁극적인 관심사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하다는 겁니다.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의 마음을 한번 들여다보시면 좋겠습니다. 당신의 Ultimate Concern, 즉 궁극적인 관심은 무엇입니까? 정말 간절한 소원이 무엇입니까? 만일 이 아침에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을 양파껍질 벗기듯 벗긴다면, 여러분 마음 중심에 남아 있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오늘날의 한국 교회를 보십시오. 이제 곧 입시철이 다가올 텐데, 그렇게 되면 교회의 새벽기도회와 주일예배는 차고 넘칠 것입니다. 그러나 입시철이 끝나면 새벽기도회에 참석하는 사람이 갑자기 줄어버립니다. 무엇을 하느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 마음 중심에 무엇이 자리잡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Ultimate Concern, 궁극적인 관심사, 최후의 소원이 무엇인가!
오늘 시편 119편 마지막 구절을 읽었습니다. 히브리어 22개의 알파벳 중에 마지막 '타우'-영어의 T에 해당됨- 시작하는 구절입니다. 이 마지막 단락에서 시편기자는 자기의 궁극적 관심을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가 평생 마음에 품은 최후의 소원과 관심사가 무엇이었는가를 간증하며 이 장엄한 시편을 마무리짓고 있습니다.
저도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조용히 기도했습니다. 언젠가 생애를 마감하며, 마지막 일기를 쓸 때 이런 간증을 남기면 좋겠습니다. 내 평생 마음의 소원이 돈, 명예, 대형교회를 이루는 것, 좋은 차를 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게 이 시편기자의 고백과 같은 것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이 시편기자가 평생 가슴에 담아 두었던 소원, 저와 여러분이 가져야할 그리스도인으로서 가져야 할 궁극적인 관심사는 도대체 무엇인가? 두 가지를 소개합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적어도 이 두 가지는 마음 깊은 곳에 소원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고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1.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
169절과 170절을 보세요.
여호와여 나의 부르짖음이 주의 앞에 이르게 하시고 나의 간구가 주의 앞에 달하게 하시고
'주의 앞에'라는 단어가 중요합니다. 히브리 원어로는 '하나님의 얼굴 앞에'라고 되어 있습니다. 구약에 보면 하나님의 얼굴에 대한 단어가 많이 나오는 것을 발견할 겁니다. "주의 얼굴을 내게서 돌리지 마옵소서", "주의 얼굴을 내게 비추시옵소서" 등 많은 요청과 기도가 있지만, 신기한 것은 구약에 살았던 그 어떤 사람도 하나님의 얼굴을 직접 본 사람이 없다는 겁니다. 그렇게 기도했건만 하나님의 얼굴을 본 사람이 없었다고 성경은 얘기합니다. 그렇게 신실했던 종 모세도 언젠가 하나님의 얼굴을 보여달라고 기도했어요. "아버지 하나님, 당신의 얼굴을 내게 보여 주옵소서!" 그러자 하나님이 대답하십니다.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그 이유는 이 세상에 내 얼굴을 보고 살아 남을 자가 없음이니라!" 하나님의 얼굴을 보면 우리가 살아남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바위틈에 들어가 있으라고 명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손을 가리시고 그 앞을 지나가십니다. 그리고 나서 하나님의 등만 보여 주셨어요.
왜 얼굴은 안보여 주시고 등만 보여 주셨습니까? 등은 괜찮고, 왜 얼굴은 보면 안 된다는 겁니까? 하나님 얼굴이 너무 징그럽게 생겨서 보는 순간 심장마비를 일으키기 때문일까요? 이것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시면 곤란합니다. "하나님의 얼굴"이라는 것은 하나님 영광의 본체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100% 볼 수 없다는 겁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100% 본다면 우리는 죽을 것이라고 얘기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완벽하게 거룩하시고 죄가 없는 분인데 우리는 죄가 많고 부족함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을 100% 목도하게 되면, 죄가 있는 상태로 그 자리에서 죽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하나님은 당신의 얼굴을 보여주지 않으십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하나님의 영광을 100% 우리에게 보여주지 않는다는 얘기입니다. 등을 보여 주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이 땅에서 행하신 일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배울 수 있다는 뜻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영광이 그의 앞을 지나고 난 다음에, 그 반영된 영광을 바라보며 하나님을 알게 되었듯이, 우리 역시 하나님을 직접 대면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나의 삶, 다른 사람의 삶과 우리에게 말씀하신 설교 등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의 등, 하나님의 흔적을 통해서 하나님을 배울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연약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죄가 있고, 우리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영원히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없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언젠가 하나님 영광을 완전하게 목도할 날이 올 것이라고 성경은 얘기합니다. 그 때가 언제입니까? 우리가 다시 부활하는 날입니다. 다시 말하면, 저와 여러분에게 죄가 완벽하게 없어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로 말미암아 구원받아 죽고 나서 주님과 같이 부활합니다. 그럴 때 우리의 연약함이 다 없어집니다. 우리 안에 성화가 100% 이루어집니다. 이렇게 우리가 깨끗하게 될 때, 저 천국에 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하나님의 영광의 참모습을 남김없이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시편기자의 기도제목은 무엇입니까? "하나님, 내가 주의 앞에서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내가 하나님 얼굴 앞에서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왜 시편기자는 이 땅에서 이루어질 수 없는 기도를 드렸을까요? 이 말씀을 잘 깨달아야 합니다. 글자 그대로 하나님 얼굴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의 소원은 언젠가 완벽하게 성화될 때 하나님 얼굴을 보겠지만, 지금 이 땅에서 그 삶을 맛보며 살겠다는 겁니다. 이것이 그의 소원입니다. "오, 하나님! 나의 연약함으로 이 땅에서 하나님 얼굴을 직접 보지 못하지만, 이 땅에 사는 동안 하나님을 바라보는 기쁨과 감격에 가득 차서, 당신의 영광을 맛보며 살아가기를 소원합니다. 저를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비록 죄가 많아 하나님 영광을 100% 목도하지 못하지만, 그러나 부족한 상태로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 여전히 시험에 빠지고, 마음에 음욕이 일어나고, 미움이 생기고, 갈등이 생기고, 세상의 풍랑을 만나지만, 언젠가 완벽하게 성화될 그 모습을 바라보며 이 땅에서도 주의 앞에서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제가 구원받았사오니 세상 사람과 똑같이 살기를 원치 않습니다. 하나님 저를 바라보시고 주 앞에서 살게 하옵소서!" 이것이 시편기자의 기도였습니다.
이 땅에서의 삶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아주 지위가 높고 존경하는 사람을 만나면 어떻게 합니까? 그 사람 앞에서, 반바지에 슬리퍼 신고 머리가 헝클어진 채로 마음대로 행동합니까? 만약 오늘 우리 교회에 아주 유명한 목사님이나 대통령이 온다고 한다면, 그런 차림으로 나갈 수 있습니까? 아마 목욕하고 머리에 무스를 바르고 어떤 옷을 입을지 신경을 쓸 겁니다. 이런 태도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경솔하게 이 땅을 살기를 원치 않습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살기를 원치 않습니다. 코람 데오! 하나님 앞에서 살기를 원합니다. 이것이 나의 궁극적인 소원이요, 관심사입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 사는가, 사람 앞에서 사는가? 이런 질문으로 자신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시편기자의 소원이 저와 여러분의 소원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1) 깨달음에 대한 요청
그는 하나님 앞에서 살기 위해서 필요한 두 가지를 기도의 형태로 요청하고 있습니다. 169절을 보세요.
여호와여 나의 부르짖음이 주의 앞에 이르게 하시고 주의 말씀대로 나를 깨닫게 하소서
하나님 앞에 살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주의 말씀을 깨닫는 것이라고 그는 얘기합니다. 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살지 못합니까? 깨달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은 예화나 재미있는 얘기를 하면 얼굴이 피어납니다. 그런데 성경을 조금 깊게 강해하면 사막의 화초같이 시들어 가는 사람이 있어요. 그럴 땐 아예 마음 문을 닫아버립니다. 정말 신기합니다. 똑같은 설교를 했는데 어떤 사람은 깨달음이 굉장합니다. 어떤 사람은 소 닭 쳐다보듯 합니다. 왜냐하면 깨달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잘 깨달을 수만 있다면 하나님 앞에서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왜 하나님 앞에 살지 못합니까? 왜 구원받고서도 세상 눈치보며 물질을 위해서 이 땅의 것을 위해서 구원받지 않은 사람같이 살아갑니까? 그 이유는 깨달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깨달음을 위해 기도합니다.
제가 오늘 성경 본문에 등장하는 단어를 연구하다가 축복을 많이 받았는데, 주로 '깨닫게 하소서' 라는 명령형으로 되어 있어요. 히브리어에는 특별한 명령형이 있어요. '이리 오라' 고 명령을 할 경우에, 히브리어의 마지막 알파벳 '타우'를 붙이면 특별한 명령형이 됩니다. 영어로는 jussive type 명령형입니다. 즉, "아버지 하나님, 나를 가르쳐라" "내게 길을 가르쳐 다오" 하고 명령할 수 있지만, '타우'를 붙이면 "당신이 내게 길을 가르쳐 줄 수 있겠습니까?" 하고 요청하는 겁니다. 너무나 겸손하게 여쭈어 보는 겁니다.
"주여 나로 깨닫게 하소서" 이 말은 "주님, 나를 깨닫게 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제가 이런 기도를 해도 괜찮겠습니까?"
왜 이런 요청을 했습니까? 이 시편기자는 하나님 말씀을 깨달을 자격이 자기에게 없는 것을 알았어요. 머리가 나빠서가 아니라, 도덕적으로 신앙적으로 영적으로 자신의 부족함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깨달음을 요청할 때, 그는 굉장히 겸손한 모습으로 자신의 의와 공로에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을 의지하며 요청하는 겁니다.
"아버지 하나님, 나는 이 깨달음을 요청할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제가 너무 부족합니다. 지난 한 주간 하나님 말씀 앞에 부족하게 살았어요. 나쁜 생각했고, 부부간에 다투었고, 직장에서 잘못 살았어요. 그러나 이 예배시간에 구하나니, 제가 당신만이 주시는 깨달음을 요청해도 되겠나이까? 아버지 하나님의 은혜에 의거하여 깨달음을 요청하옵나이다!"
이것이 시편기자의 태도였습니다.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이런 깨달음에 대한 아름다운 요청이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2) 건져주심에 대한 요청
170절을 보세요.
나의 간구가 주의 앞에 달하게 하시고 주의 말씀대로 나를 건지소서
'건지소서' '구하옵소서' 등의 말은, 이 땅의 물질적인 것을 위한 기도가 아닙니다. "주님, 제가 세상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살려고 합니다. 제 마음에 세상 철학이 있습니다. 세상적인 시야와 판단으로 제 인생을 보려고 합니다. 말씀을 들을 때는 하나님의 눈으로 보려고 하다가도 돌아서면 잘못된 마음이 있사오니, 이런 영적인 탈선에서 저를 건져 주옵소서!" 이런 말입니다. "주여! 나를 건지시옵소서!" 이런 기도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살기 위해 이런 기도가 필요합니다. 잘못된 정욕, 돈에 대한 욕심, 미움, 믿음 없음 등 이 모든 것들로부터 나를 건져달라는 기도입니다. 이것이 시편기자의 궁극적인 소원이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나를 하나님 앞에서 살게 해 주십시오!"
한 철학자는, 인간을 기수가 조종하는 말에 비유했습니다. 보통 고삐에 매인 말이 기수가 이끄는 대로 갑니다. 사람도 그와 유사하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무엇인가에 끌려 살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돈에 끌리고, 지위에 끌리고, 정욕에 끌리고, 명예에 끌리고, 과거의 죄악에 끌리고, 염려에 끌립니다. 우리는 무엇인가에 끌려 살게 됩니다. 스스로 한번 질문해 보세요. 당신은 무엇에 끌려 살아가고 있습니까? 당신 마음속에 있는 진정한 소원이 무엇입니까? 궁극적인 관심사가 무엇입니까? 무엇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되었나요? 무엇에 끌려 이 예배에 나오셨나요? 무엇에 끌려 집사노릇하고, 직분을 받아서 봉사하고 계십니까? 여러분을 끌고 가는 것이 무엇인지 질문하셔야 합니다.
저는 목사가 되어서 목회를 열심히 했어요. 안식년을 맞이하여 지난 6년을 돌아보며, 나름대로 목회를 열심히 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나를 이끌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발견하고 하나님 앞에 얼마나 회개했는지 모릅니다. 나도 모르게 대형 교회를 이루어서 명예를 획득하는 것, 사람들에게 더 많은 존경을 받는 것, 그런 것들이 아름다운 포장지로 싸여서 내 마음속에 꼭꼭 숨어 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내가 목사가 되고 목회를 한다고 입으로는 얘기했지만, 어느덧 내 마음속에 그런 것들이 자리잡고 있었어요. 다른 것이 나를 끌고 있었어요.
이 시편기자도 그런 경험을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기록될 성경과 시를 쓰도록 유명한 신앙을 가진 사람이었지만, 어느 날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니 자기를 끌고 있는 것이 다른 것이었어요. 그래서 기도한 것입니다. "아버지 하나님, 내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 앞에 살겠습니까? 내 평생 소원이 있사오니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이 소원을 이루어 주시옵소서!" 이 기도가 우리에게 끊이지 않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2. 하나님을 찬양하며 사는 것
171절과 172절, 174절을 보세요.
주께서 율례를 내게 가르치시므로 내 입술이 찬송을 발할지니이다
주의 모든 계명이 의로우므로 내 혀가 주의 말씀을 노래할지니이다
여호와여 내가 주의 구원을 사모하였사오며 주의 법을 즐거워하나이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왜 인생의 궁극적인 소원일까요? 성경에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구절이 많이 나옵니다. 왜일까요? 이 시편기자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자신의 인생에 가장 큰 행복임을 깨달았던 겁니다.
물고기는 언제 가장 행복할까요? 물에서 살 때입니다. 물고기를 뭍에다 두면 금방 죽습니다. 새는 언제 가장 행복할까요? 하늘을 날 때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렇게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어떻게, 왜 만드셨는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만들었어요.
성경에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가 '할렐루야'입니다. 히브리어로 '주를 찬양하라' '하나님을 찬양하라'입니다. 히브리어로 '야' '엘' 이런 말들은 다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이기적으로 자신을 찬양하라고 합니까? 아닙니다. 바로 우리를 위해서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할 때, 가장 행복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찬양해야 할 존재로 창조함을 받은 줄 믿습니다. 이 세상에서 아무도 하나님을 찬양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을 만드실 때, 유독 사람에게만 하나님의 형상을 허락하시고 영(靈)을 주셨습니다. 이 영(靈)을 가진 인간은 언제 가장 행복을 느끼는가? 하나님과 만날 때,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 존전(尊前)에서 살아갈 때에, 가장 큰 행복을 느끼도록 지음 받은 겁니다.
우리는 이것을 금방 증명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그 어느 것에서도 만족을 느낄 수 없도록 지음 받았어요.
예를 들어 건강하면 행복할 것 같습니까? 건강한 사람에게 물어보세요. 하루 두시간씩 운동하고 몸에 해로운 것은 일체 안 먹고, 몸에 좋은 것은 돈이 아무리 들어도 먹습니다. 그리고 헬스 클럽에 내는 돈은 아까운 줄 모릅니다. 평소에 많은 노력을 해서, 완벽하게 건강합니다. 그런 사람에게 행복하냐고 물어보면 그렇지 않다고 대답합니다. 돈이 있으면 행복할 것 같습니까? 돈 많은 사람에게 물어보십시오.
저는 미국과 한국에서 돈 많은 사람을 많이 만났어요. 서울에서 이름만 대면 알만한 돈 많은 장로님이 있어요. 제가 호기심이 생겨서 묻습니다. "장로님, 그렇게 돈이 많은데, 행복하십니까?" 그 질문에 장로님이 정색을 합니다. "목사님, 절대로 아닙니다. 제가 아주 행복했던 때는 옛날에 봉급 받으며 한 푼 두 푼 모았을 때입니다. 돈이 많으니까 너무 고민이 많아요. 자식들도, 친척들도 모두 제 돈을 뜯어가려는 늑대들입니다. 이것을 방어하려고 하니 얼마나 큰 고역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제가 "그 고민되는 것, 하나님께 바치시지요!" 말씀 드려도 끝끝내 안 바치더군요.
여러분, 속지 마세요. 공부를 많이 해서 박사학위 두 개, 세 개 따면 행복할 것 같습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그렇게 창조되지 않았어요. 그런 것들로 우리는 행복을 이룰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않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의 '소유'라는 단어의 의미는 포괄적입니다. 건강, 물질, 명예 등등 그 어떤 것이든 우리의 생명이 소유 때문에 더 나아지거나 넉넉해지지 않는다고 가르쳐 주신 겁니다.
우리는 언제 만족하는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신 본연의 사명인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의 영과 깊은 교제를 할 때, 진정한 행복이 있을 줄 믿습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시편기자는 그의 마지막 소원을 이렇게 아뢰는 겁니다.
"아버지 하나님, 내 평생에 당신을 찬양하며 살고 싶습니다!"
어떤 사람은 찬양을 노래하는 것이라고만 생각합니다. 그것만이 아니라, 교회나 가정, 직장에 있을 때 무엇을 하든지, 성경공부, 기도, 설거지, 청소를 할 때도 하나님을 찬양하는 마음으로 하게 되면 그 모든 것이 찬양이 되는 것입니다. 남편노릇, 아내노릇 잘할 때 하나님께 찬양이 돌아가는 것을 믿으십니까?
"내가 언제 무엇을 하든, 내 평생 삶을 통해 당신을 찬양하기를 원합니다. 아버지, 나를 도와주세요!" 이것이 시편기자의 궁극적인 관심사였어요. 어떻게 하면 하나님 앞에서 살 것인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 앞에 찬양의 삶을 살 것인가? 이것이 그의 소원이었습니다.
오늘 이 아침에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 스스로에게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당신의 소원은 무엇입니까? 저는 화요일에 몽골에 들어갔다가 그 다음에 안식년을 보내기 위해 한국을 떠나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왜 안식년을 떠나느냐고 물어 봅니다. 저는 지쳐서 안식년 가는 것이 아닙니다. 체력, 정신력 다 좋습니다.
안식년 떠나는 이유는, 제 마음에 소원이 있기 때문입니다. 안식년을 준비하면서 제 집사람과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이 일년동안 하나님 앞에 다시 서기를 원합니다. 하나님, 내가 당신 앞에 다시 올바로 서기를 원합니다" 저는 자나깨나 이 기도를 드리고 있어요. 하나님 앞에서 살고 싶어요. 사람과 세상을 의식하지 않고, 욕심을 의지하지 않고, 다 구원받아 하나님 앞에서 제 인생을 살고 싶어요.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어떤 일이 있어도, 내 앞에 어떤 길이 펼쳐질지라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 길을 달려가고 싶은 소원이 있습니다. 저는 1년 동안 이 기도제목으로 주님 앞에 조용히 기도하길 원합니다. 그래서 안식년을 떠납니다.
사랑하는 영안 성도 여러분! 시편기자만 이런 소원을 하나님께 아뢸 것이 아니라, 저와 여러분의 소원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1년 후, 다시 만났을 때, 우리 모두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존전에서 살았음을 간증했으면 좋겠습니다. 이 소원이 여러분의 남은 인생 내내 마음에 남아서 하나님 앞에 기도 드리는 하나님의 사람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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