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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께서 나를 보내셨나이다
    2002-01-22 11:42:13   read : 15195

    창45:1-15 2002.1.20

    사업이 잘 되어서 큰돈을 번 기업가 한 분이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목사님, 저는 다른
    사람들에게 돈 좀 있다는 소리를 들으며 살고 있는데요, 사실 저는 변변한 옷 한 벌 없고,
    식사 한 끼 제대로 사 먹지를 않습니다. 그저 국수 한 그릇이면 되고, 몸이나 가리면 되지
    뭐 더 필요가 있는가 그런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우리 아이들은 전
    혀 안그래요. 돈 잘 씁니다. 그걸 보면서 한편으로는 걱정도 되고, 한편으로는 참 신나겠다
    --- 이렇게 부러운 생각도 듭니다. 그러면서 스스로 질문을 합니다. 나는 왜 그러지를 못할
    까? 나는 왜 나를 위해서 한 푼도 못 쓰고 발발 떨고 있을까? 주님이 주신 축복을 누릴 수
    도 있는데 왜 그러지를 못할까? 그러면서도 되지 않는 나 자신에 대하여 화가 나기도 합니
    다. 이게 인색한 것일까요? 절약이 몸에 밴 검소함 때문일까요?"
    그래서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내가 안 입고, 안 쓰고, 안 먹고, 그리고 절약해서 모은
    돈 가지고 기쁜 마음으로 남을 도울 수 있고 즐거운 마음으로 자식을 위해 쓸 수 있으면 그
    건 절약이 몸에 밴 것이니까 아무 걱정이 없습니다. 그러나 있으면서 남도 주지 못하고, 자
    기를 위해 쓰지도 못하고, 그러는 그 모습에 화가 난다면 무언가 좀 치료를 받아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랬더니만 "무슨 치료요?" "감정의 치료입니다." "어떤 감정 말입니까?" "아마도 돈 쓰는
    문제에 있어서 큰 상처가 있는 것 같습니다. 대개 예수를 믿게 되면서 사람들은 하나님이
    내게 주신 은혜를 고백하게 되고, 그러한 과정 속에서 웬만한 상처들은 그저 저절로 치료되
    는 것이 아름다운 것이지만, 상처가 워낙 강할 때는 거저 없어지지를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
    상처를 주님께로 가지고 가서 나를 치료해 주시라고 기도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어떤 부분
    에 있어서 내가 지나치게 예민한 반응을 보인다면 나는 그 부분에 대하여 상처를 가지고 있
    다고 하는 사인이며, 특별히 요즘 그 문제를 가지고 심히 고민하고 있다면 하나님께서 그
    문제를 손대시고 치료하실 생각이 있는 것 같으니까 겸손하게 나와서 기도를 좀 해 보시지
    요." 그렇게 권면을 했습니다.
    얼마 후에 그 분을 만났는데 의미 있는 경험을 했다고 하면서 하는 말이 자기가 어릴 때
    운동을 아주 잘했답니다. 그래서 학교 대표로 더 큰 체육대회에 나가게 되었는데 신발이 없
    는 거라. 어찌어찌 해서 그것을 알게 된 먼 친척 한 분이 신발 한 켤레 살 정도의 돈을 보
    내주었는데 당장 먹을 것이 없는 가족들의 형편상 그걸 외면하고 신발을 살수는 없었답니
    다. 그래서 그 돈으로 밀가루를 사면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답니다. 그리고 나서 어쩔 수가
    없어서 남이 버린 운동화를 주워 다가 헝겊을 대고 깁고 또 깁고, 또 깁고 해서 신었는데
    그 생각이 나면서 하도 자기의 옛 모습이 불쌍해서 눈물을 흘리고 있는데 갑자기 어깨 위에
    따뜻한 손이 하나 올려지는 것 같더랍니다. 그 분의 말입니다. "주님이 어루만져 주시는 손
    길 아닌가? 나는 몰랐지만 내가 고생하던 그 때에도 주님은 나를 어루만져 주셨고, 나를 위
    로해 주셨고, 그 때 고생이 힘이 되어서 오늘의 내가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면
    서 그 후로부터 물질에 대해서 자유케 되었습니다." 그런 고백이었습니다.
    우리의 삶에서 가장 힘들고 고통스러운 때가 영적으로 혼미할 때입니다. 즉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있는 것은 분명한데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어인지 알 수가 없고 상황은 자신
    의 의도와 달리 절망적인 방향으로 진전될 때 우리는 고통을 느낍니다.
    여러분 우리가 살아가면서 때로 다른 사람들에게, 혹은 인생의 고통 속에서 상처를 받기
    도 합니다. 그 상처가 너무 커서 거기서 헤어나지 못하는 분들도 참 많습니다. 어떻게 이러
    한 우리 속에 있는 상처들을 치료하고 아름답게 살아갈 수 있을까 하는 것은 우리 모두의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본문은 창세기 후반부에서 가장 극적인 부분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본문에
    서 정말 중요한 점은 단순히 요셉이 형들 앞에서 자신의 정체를 드러냄으로써 형제들과 하
    나가 되었다는 것 그 자체가 아닙니다. 그들을 다시 하나로 만들어 준 것은 지금까지 일어
    난 모든 일에 대한 요셉의 설명이었습니다. 애굽의 총리가 바로 자신들이 팔아먹은 동생이
    라는 말을 듣고 엄청난 두려움에 빠진 형들에게, 요셉은 전부터 꿈을 해석해 왔던 것처럼
    이제껏 일어난 모든 일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설명해 주었습니다. 이처럼 그가 하나님의 뜻
    을 가지고 설득했을 때에야 비로소 형제들은 그 모든 원한과 미움을 극복하고 사랑으로 하
    나가 될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다른 사람에게서부터 받은 과거의 상처를 용서하는 사람의 아름다운 모습과
    그 용서할 수 있는 진정한 힘이 어디로부터 나왔는가 하는 것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44장을 보면 요셉이 베냐민을 고향으로 돌려보내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통하여 형제들이 아버지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리고 동생에 대한 우애가 어떤가를 확인코
    자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때 유다라고 하는 형이 일어나서 하는 말이 자기들의 수십
    년 전의 지나온 죄를 하나님 앞에 뼈져리게 고백하면서 아무도 원망하지 않고, 그리고 달게
    받을 각오와 함께 늙은 아버지 더 이상 괴롭혀 드릴 수 없고, 어린 동생 이방 땅에서 종만
    들 수 없으니 "내가 대신 종이 되겠나이다" 그러한 고백을 했고, 그 고백을 들으면서 온 형
    제들이 울고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게 되면서 요셉의 마음속에는 '이제 됐다.'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자기 옆에 있는 모든 시종들을 빨리 물러가라 그렇게 말하고, 감격
    에 북받쳐서 어쩔 수가 없어서-- 오늘 본문 2절을 봅니다.
    "요셉이 방성 대곡하니 애굽 사람에게 들리며 바로의 궁중에 들리더라"
    저는 그 동안 요셉이 절대로 울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울면 약해지고, 약해지면
    애굽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20년
    동안 울지 않았습니다. 억울하게 감옥에 갇혔을 때에도, 술 맡은 관원장에게서 아무 소식이
    들려오지 않았을 때에도 그는 울지 않았습니다. 한번 울어 버리면 더 이상 버틸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형들 앞에서 아픈 부분이 노출되었을 때, 이제는 형들을 믿을 수 있다는 판단이
    섰을 때, 20년 동안 억눌러 왔던 그 눈물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통곡은 주위 사
    람들뿐 아니라 바로의 궁에 까지 들릴 정도로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가끔 보면 나이에 걸맞지 않게 어른스럽게 행동하거나 자신의 감정을 잘 통제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말이나 행동이 아주 완벽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어른스러운 사람이
    다른 한편으로는 아주 어린 아이 같은 모습을 보일 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공식적인 자
    리에서는 바늘 끝도 들어가지 않을 것처럼 엄격하게 자신을 통제하는 사람이, 마음을 털어
    놓을 수 있는 친한 사람들 앞에서는 유치해 보일 정도로 웃고 떠드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여
    주는 식입니다.
    그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습니다. 그의 마음속 어딘가에 깊은 응어리와 상처가 있는 것
    입니다. '나를 지켜야 해. 아무한테나 나를 노출 시켜서 약점을 잡히면 안되지'라는 강한 자
    의식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작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의 마음속에는 오래 동안
    고여온 그리움과 눈물이 있습니다. 이것이 한번 터지면 걷잡을 수 없이 쏟아져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요셉은 형들과 그냥 자연스럽게 만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긴긴 세월 동안 형들을 그
    리워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자기를 죽이려고 한 일이나 자기를 팔아먹은 일은 여전히
    이해되지 않았고 야속했기 때문입니다. 아마 그는 형들을 생각할 때마다 마음 아프지 않은
    적이 않았을 것입니다. 그의 마음속에는 사랑과 증오가 뒤섞여 있었을 것입니다. 형들이 자
    기에게 보였던 적대적인 모습을 생각하면 '내가 이렇게 살아 있을 필요가 뭐가 있나'하면서
    마음이 쓰라렸을 것이고, 그러면서도 아버지나 현들이나 동생이 보고 싶어서 가슴이 저렸을
    것입니다. 그렇게 20년을 지내온 것입니다.
    하나님은 요셉을 너무나도 사랑하셔서 20년 동안 참아 온 울음을 마음껏 터뜨리게 하셨습
    니다. 아마 누가 말리지 않았으면 영원히 울었을지도 모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눈물을 통
    해서 요셉을 더 온전하게 치료하셨고 더 풍성하게 하셨습니다.
    크게 방성 대곡, 목놓아서 펑펑 울었다--- 그런 말입니다. 20년 동안 참았던 눈물이 터져
    나왔을 때, 요셉은 처음으로 어느 누구도 의식하지 않은 채 마음껏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면
    서 울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그의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 잡은 마음의 상처가 치료되는 순
    간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이제 자기 형들에게 히브리말로 말합니다. '아니 요세프'.
    '나는 요셉입니다.' 그런 말입니다. 자, 이 말을 듣고 형들이 얼마나 놀랐겠어요? 3절에 보면
    그렇게 말합니다.
    "요셉이 그 형들에게 이르되 나는 요셉이라 내 아버지께서 아직 살아 계시니이까 형들이
    그 앞에서 놀라서 능히 대답하지 못하는지라"
    나는 요셉입니다, 그렇게 말한 후에 그는 이제 애굽에 총리가 아닌 한 형제로서 그들을
    맞이하기 위해서 아버지 얘기를 꺼냅니다. "아버지가 살아 계십니까?" 요셉은 이제 비로소
    진정으로 형들을 용서했습니다. 자기를 죽이려 했고, 노예로 팔아먹은 형들을 말입니다. 그
    가 얼마나 철저하게 용서했는가? 오늘 본문은 자세히 묘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용서를 말하지만 완전하지 않은 용서를 용서로 착각할 때가 참 많습니다.
    "그냥 잊으려고 하지요." 생각을 안하는 것을 용서라고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자기 마음을
    달래는 정도, '그만 두자. 내가 참지.' 뭐 이 정도가 용서라고 생각하는데 아니올시다. 용서는
    종합적인 것입니다. 지, 정, 의. 내 이성, 내 판단, 내 의지, 내 감정까지 전부다 다 포함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완전한 용서입니다. 이렇게 완전하게 용서해야만 그 사건으로부터 온전히
    자유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요셉도 처음에는 형들의 그러한 소행이 이해될 수 없었고, 그래서 분노하고, 이를 갈기도
    했겠지요? 그러나 그는 고통 속에서 생각을 합니다. '나는 모르지만 무언가 하나님께는 나를
    향한 뜻이 있을 거야. 지금까지 나를 살려주신 하나님, 그리고 내게 꿈을 주신 하나님이 이
    렇게 인생이 끝나게 하시지는 않을 거야.' 그렇게 시간이 지나가면서 그는 더 이상 왜냐고
    하나님께 묻는 것을 중단합니다. 그리고 완전히 하나님께 맡기고 하루하루를 성실하게 살아
    갑니다. 그러는 가운데 그의 생각도, 그의 의지도, 그의 감정도 조금씩 조금씩 변해 갑니다.
    그래서 마침내 오늘 본문에 보면 그의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이 사건 속에는 하나
    님의 뜻이 있다고 그는 분명히 이성적으로 판단합니다. 그리고 의지적으로 용서합니다. 용서
    하기 위해서 형제들을 테스트도 했습니다. 그리고 4절을 보시면, 용서를 위한 몸부림이 있습
    니다. 4절입니다.
    "요셉이 형들에게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소서 그들이 가까이 가니 가로되 나는 당신들
    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자라"
    '내게로 가까이 오소서.' '거 슈나', 이 말은 포옹하기 위해서, 혹은 입 맞추기 위해서 다정
    하게 서로 다가가는 것을 말하는 동사입니다.
    자기 앞에서 두려워하는 형들을 이제는 정말로 따뜻하게 안아주고, 입 맞춰 주고 싶은 그
    의 마음이 그대로 드러나 있어요. 15절에 보면 그것이 이루어지지요. 형제들을 꼭 끌어안고,
    입 맞추고, 그는 울어버립니다. 의지적으로 다가가서 입 맞추고, 용서를 합니다.
    또한 감정적으로도 완전히 용서를 합니다. 우리가 함께 읽었습니다마는 요셉은 방성 대곡
    했다 그랬어요. 왜 그렇게 그가 크게 울어야 합니까? 체면 불구하고. 바로의 궁전에 들리기
    까지 그가 통곡해야 하는 이유가 뭡니까? 우리는 심리적으로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그가
    감정적으로 맺힌 것이 많았다는 말이지요. 뒤집어 말하면 원한이 많았다 그런 말입니다. 분
    노가 가득했었다 그런 얘기지요. 전문 용어로 말하자면 감정의 상처가 너무도 컸었다는 말
    입니다. 한 마디 더 보태면 그 만큼 용서하기도 어려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울면서, 통곡하면서 마침내 그 마음 속 깊은 곳에 있었던 눈물까지 다 쏟아
    내 버립니다. 그 감정까지 다. 그 처절했던, 막막했던, 그 분하고 억울했던 감정들--- 마음
    속에 묻어두었던 오래된 감정들까지 다 쏟아내면서 완전히 용서하게 됩니다. 생각과 의지,
    감정 다. 그래서 그의 용서는 완전한 것입니다. 완전하게 용서했고, 완전하게 그 사건으로부
    터 그는 자유하고, 치유를 받게 됩니다.
    그렇다면 그러한 완전한 용서가 어떻게 가능했겠는가 하는 것이지요. 그 힘이 어디서부터
    나왔는가? 그것이 오늘 설교 제목 아닙니까? 하나님이 나를 보내셨나이다. 이 사건 속에 하
    나님의 주권적 섭리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고백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용서의 시작이요,
    치유의 시작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이 곳에 보냈다고 해서 그가 분명하고 객관적인 사실을 몰랐느냐 하면 아
    니요. 5절에 보면 분명히 말합니다.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아먹었으나---' 그랬어요. 형
    들이 그를 팔아먹은 객관적인 사실을 그는 분명하게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이 곳으
    로 보냈다고 하니까 그럼 다른 사람들은 모두 헛깨비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를 보냈
    다고 하는 신앙 고백은 현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분명히 팔아먹은 형들이 있고, 그들
    이 죄 지은 것도 사실이고, 자기가 노예가 되어서 여기 와서 죽도록 고생한 것도 현실이고,
    그런 가운데서 그가 열심히, 성실하게 노력해서 인정받은 부분도 있다는 것을 우리는 부인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 보다, 이 모든 것을 다 통합해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위
    대한 주권적 역사, 그가 그것을 바라보고 고백하게 된 것입니다. 그것을 인정할 때에 모든
    것은 객관적인 사실의 차원을 넘어서 새로운 차원으로 나가게 됩니다. 모든 사건을 하나님
    을 염두해 두고 하나님을 통하여 보면 모순의 장막이 다 걷히고, 그 속에 새로운 안목이 열
    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 마음과 이 고백이 없을 때 그는 인간적인 생각에 완전히 붙들리고
    그런 식으로만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원망, 불평, 상처투성이의 인간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나는 방황한다고 했지만 하나님께서 내 걸음을 정확하게 인도해 오셨다는 것, 그 큰사랑
    으로 오늘 이 자리에 이르게 하셨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누구를 원망하고
    미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내 걸음이 늦어졌을 때는 늦어져야 할 이유가 있었고, 빨라졌을 때
    는 또 빨라져야 할 이유가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요셉은 다섯 번이나 강조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만드
    셨다.' 하나님 중심으로 생각할 때, 더 높은 섭리를 인정할 때 바르게 생각할 수가 있고, 진
    정으로 용서할 수 있는 것이지요. 그것을 보여주고자 했던 것입니다.
    어떤 부인이 자기 집 화장실에 세수비누를 사다 두는 것을 잊어버렸습니다. 남편이 목욕
    을 하다 보니까 비누가 없어요. 화가 나서 한 마디 했습니다. "내가 비누 없이 목욕한 지 일
    주일이 넘었어." 그러자 부인이 발끈합니다. "뭐요? 일주일이나 되었다고?" 그래서 이 부부
    는 싸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7개월 동안 그 부부는 방을 따로 쓰고, 세 끼 밥 먹을
    때 한 마디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노벨상 수상작가인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즈(Gabriel
    Garcia Marquez)' 교수가 쓴 <콜레라 시대의 사랑>이란 책의 내용입니다.
    어떻게 비누 한 장 때문에 7개월 동안 그럴 수가 있을까? 대답은 이렇습니다. "미안해요.
    용서하세요." 이 말을 아무도 먼저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그래서 '루이스 스미디즈'는 말
    합니다. 용서를 통하여 치유 받는 최초의 사람은 바로 용서하는 자 자신이라고.
    그러므로 여러분, 용서해야 합니다. 겉으로 말고 진심으로, 하나님 앞에서, 신앙 고백과 함
    께, 깨끗하게 용서해야 합니다. 그래야 치유를 받습니다. 치유만 받는 것이 아닙니다. 용서하
    면 축복의 문도 열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이 사건의 궁극적인 의미인 사명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그 사명을 감당할 힘도 공급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셉은 "하
    나님이 나를 보내셨나이다"라고 고백했고, 그 모든 것을 이 관점 하에서 조망해 나갑니다.
    그는 용서했고, 축복도 받았고, 그러므로 이제 그렇다면 하나님이 나를 보내신 이유, 그 사
    명을 찾습니다. 7절을 봅니다.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니"
    결국 이 모든 일을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20년 동안 안개를 헤맨 그들
    앞에 나타난 결과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야곱의 아들들을 구원하기 위해, 가나안에 잇
    는 교회를 이 기근으로부터 구원하기 위해 요셉을 보내셔서 바로의 아비와 애굽 온 땅의 치
    리자로 삼으셨으니 아무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결국 20년 동안 미움과 증오로 나뉘어 있던 형제들을 하나 되게 한 것은 하나님의 뜻이었
    습니다.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이 역사를 이루기 위하여 나를 당신들 앞서 이 곳으로 보내신 것입
    니다. 여기에 고난의 목적이 나옵니다. 큰 구원. 고난의 목적은 구원입니다. 그러므로 이 고
    난을 겪은 나는 하나님의 계획인 이 구원을 성취해야 되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가 마
    지막으로 결단한 것이 9절입니다. '아버지를 애굽으로 모셔와야 되겠다. 형제 모두를 불러야
    되겠다.' 그렇게 제안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보내셨나이다.' 이 고백이 요셉을 용
    서의 사람으로 만들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존재를 전 애굽에 알리는 축복의 사람이 되
    게 합니다. 그리고 이 거룩한 야곱의 가문을 보존해서 새 역사를 창조하게 하는 위대한 사
    명을 감당하는 사람으로 그를 변화시켜 냅니다.
    우리 안에는 아직도 더 치료받아야 할 부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남에게 자기 약점을 보이
    지 않으려고 애쓰는 사람일수록 자신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견고한 담을 쌓고 있는가를 본
    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오랜 세월 참고 참았던 눈물주머니를 하나님 앞에서 터뜨
    려야 합니다. 나 자신을 지키기 위해 수많은 시간 억눌러 왔던 눈물주머니를 터뜨려서 어린
    아이처럼 한번 울어 봐야 합니다. 그리고 이제는 약점을 잡히지 않으려고 자신을 위장하는
    수고를 그만 두어야 합니다. 그때 자연스럽고 건강한 내 모습, 남을 포용할 수 있을 만큼 편
    안하고 따뜻한 마음을 지닌 하나님 자녀의 참모습이 회복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언제나 우리의 생활 속에 이 고백이 분명하고, 자주, 그리고 살아 있어
    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보내셨나이다.'
    "내가 이 놈의 집구석에 시집을 왜 왔나?" 그렇게 묻는 것을 이제는 중지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이 가정에 보내셨나이다." 고백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수지교회에 보
    내셨나이다." 그렇게 고백하세요. 많은 것이 새로워질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직장으로 나
    를 보내셨나이다." 그렇게 고백할 때 불평과 원망이 없어집니다. 그리고 나의 자세를 바로
    할 수가 있고, 성실하게, 신뢰를 가지고 일에 몰두할 수 있습니다. 거기서 사랑과 신뢰의 관
    계가 싹트게 되고, 축복의 문이 열리며,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는 거룩한 역사를 이루어내게
    되는 것입니다.
    언제나 많은 사람들이 갈등하는 것을 보면 이 고백이 분명치 않아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갈등하고, 싸우고, 실패하고--- 그러한 일들이 너무나도 비일비재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
    니다.
    여러분, 내가 가게에서 물건을 팝니까? 팔면서 생각을 하겠지요? '이것 팔아서 돈을 더 많
    이 벌어야 될텐데--- 그리고 돈 많이 벌어서 주의 일 해야 될텐데---' 아닙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하고, 더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이 있어요. '하나님이 나를 이 곳으로 보내셨나이다.'
    그것을 고백하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자, 그러다 보면 그 가게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다른
    가게보다 더 친절해지겠지요? 그리고 물건 질에 비해서 값이 비싸다는 욕은 먹지 않겠지
    요? 그리고 더 전문적으로, 전문성을 띠겠지요? 그래서 평판이 좋아지겠지요? 그리고 사람
    들이 묻겠지요? "이 가게 참 좋으네요. 그 비결이 뭐죠?" 그러면 무엇이라고 대답하시겠습
    니까? 대답 여기 다 나와 있는데요--- "하나님이 나를 이 곳으로 보내셨나이다." 여러분,
    이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거기서 욕먹고 많이 벌어서 일하겠다? 그런 소리
    하지 마세요. 하지도 않으면서 말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이 곳으로 보내셨나이다" 이 고백이 없는 한 내가 심기워진 그 곳에서 번
    영할 수 없습니다. 이 고백만 분명하다면 비록 내가 일하는 현장이 불리하고, 여건이 어려워
    도 결국은 좋은 것으로 얼마든지 변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욕심과 인간적인 생각과
    짧은 안목 때문에 하나님의 높은 섭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넘어갈 때가 너무나도 많습니다.
    그래서 '죠지 퀄리'라고 하는 사람은 이렇게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나는 이상한 꿈도
    예언자의 황홀경도 원치 않으며, 육체의 장막이 갑자기 갈라짐도, 천사의 방언도, 하늘의 열
    림도 원치 않습니다. 다만 원하오니 내 영혼의 희미한 시력을 밝게 하여 주옵소서."
    영혼의 시력이 회복되어야 되는데 그러면 아무 목적도 없고, 항상 어려운 일만 계속하여
    일어난다고 하는 내 삶을 다르게 보게 될텐데--- 그래서 '하나님이 나를 이 곳으로 보내셨
    습니다.' 역경 속에서도 이 고백을 바로 하면서 한 걸음씩 걸어가게 될 때에 모든 의미 없는
    사건들이 서로 상합하고 조화를 이루어서 가장 아름다운 옷감을 짜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삶이 그렇게 변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모든 사건은 신학적으로 3단계가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은 나를 이 곳에 보내셨으나 나는 깨닫지 못하는 단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낙담하고, 그래서 분노하고, 때로는 교만하기도 합니다.
    그 다음 단계는 '하나님께서 나를 여기로 보내셨구나!' 그렇게 깨닫고 수용하는 단계가 있
    습니다. 여기서 용서와 화해와 깨어진 관계의 회복이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세 번째 단계는 "하나님이 정말 당신을 여기로 보내셨습니다." 서로가
    함께 고백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단계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느 단계입니까? 나 있는 곳에서 어떠한 상황이든지 "하나님께서 나를 이 곳으
    로 보내셨습니다." 고백하면서 승리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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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격려하는 사람이 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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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좁은 문에 집중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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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늘에 열린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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