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지금 무엇을 보고 있는가? 2002-03-09 11:37:24 read : 12275
눈에 보이지 않는 경계선에 서서
얼마 전, <라간(Lagaan)>이라는 제목의 인도 영화를 비디오로 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중간에 쉬는 시간까지 있는 4시간 짜리 장편인데, 지루한 줄 모르고 매우 감동적인 느낌으로 진지하게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우선, 이 영화가 다룬 시대적 배경이 눈을 끌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영국의 제국주의 통치하에 있던 인도의 고난과, 일제 식민지 시절을 겪은 우리 역사가 매우 닮아 있었다는 점, 그리고 그러한 역경을 이들은 오늘날 어떤 시각으로 정리해내고 있는가 하는 문제를 눈 여겨 볼 수 있는 작품이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모두가 그저 대 제국 영국의 거대한 힘 앞에 굴종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고 있는 상황에서 어떻게 사람들의 정신을 일깨워 새로운 현실을 만들어 낼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매우 치밀하고 힘차게 표현되어 있어 영화를 본 이후, 마음에 충격이 적지 않게 남았습니다.
라간, 약한자의 풍요
영화는 인도의 한 작은 마을에서 일어난 일에서 시작합니다. 비는 오지 않고 기근으로 땅이 갈라지면서 마을 사람들은 앞날을 감당할 일이 감감하여 깊은 시름에 빠지게 됩니다. 처지가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이 지역을 통치하고 있는 영국의 식민지 정부군의 우두머리는 라간, 즉 토지세 내지는 현물세를 바치라고 닥달을 합니다. 그리고 그것도 이런 저런 꼬투리를 잡아 두 배, 세 배를 내도록 강요하였습니다. 그렇게 되면 이들은 그저 굶고 있으라는 이야기 외에는 되지 않습니다. 자연, 마을 사람들이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에게는 영국 군대에게 항거할 만한 아무런 힘도 없었습니다. 결국 최후의 선택으로 이들은 선처를 호소하러 가지만, 박대를 당할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이들이 찾아간 시간에 영국군들이 야구와 비슷한 <크리켓>이라는 운동시합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걸 보고 마을의 한 청년이 애들이나 하는 것이지 하고 우습다는 듯이 빈정거리자 영국군 대장이 하나의 제안을 합니다. <크리켓>시합을 해서 이기면 이 마을뿐만이 아니라 영국군이 다스리고 있는 이 지역 전체 주민에게 앞으로 3년간 라간을 면제해주지만, 지면 세배의 라간을 바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시합은 석 달 후. <크리켓>이 무엇인지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내놓은 이 제안 앞에서 이들 마을 주민들은 생사가 걸린 선택을 하게 됩니다.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도저히 살아갈 수 없는 상황이 닥치고, 그렇다고 제안을 수용한다해도 영국군과의 시합에서 이길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봐야하는 처지였습니다. 그러나 결국, 영국군 대장에게 지목 당한 주인공 청년은 이 제안을 받아들이고 분노와 좌절, 허탈과 무력감에 사로잡힌 사람들을 하나 하나 설득하고 결속시켜서 결국 극적인 승리를 거두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돌이나 한 번 던져보자?
골자만 짧게 정리하니까 이야기의 생생한 긴장과 고뇌가 잘 전달되지 않아 좀 안타깝습니다. 그러나, 영국의 식민지라는 처지에 빠져 있던 인도사람들의 고난과 이 고난을 이겨내는 과정에서 서로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고 용기를 길러나가는 모습은 실로 감동적이었습니다. 결국, <정신력>이 최후의 결말을 좌우하는 것을 보면서 거대한 제국이 도리어 갖고 있지 못한 힘을 이들 가난하고 약한 백성들이 지니고 있다는 점이 강한 인상으로 다가오게 됩니다.
그런데 이 영화를 보면서 시종 머리에 떠나지 않았던 것은, 정복자인 영국군에게는 그저 시합에 불과한 <크리켓>이 이들 인도인들에게는 생명과 죽음이 달려 있는 과제가 된 현실입니다. 힘이 있는 쪽에서야 아무런 생각도 없이 던진 한마디지만, 그 말 한마디에 운명이 엇갈릴 수 밖 없는 쪽에서는 초죽음의 사태가 벌어집니다. 그것은 그냥 운동경기가 아니라, 이들의 3년의 삶이 걸린 절박한 문제였고 지역 전체의 운명을 좌우하는 중대사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그냥 3년이 아니라, 그들의 생명이 살아가는가 죽는가를 결정하는 시간이 됩니다.
어린 시절부터 크리켓 경기를 보고, 또 생활처럼 하면서 자라온 사람들과 경기규칙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시합을 한다면 그 결과는 뻔한 것입니다. 이 부당한 경기방식, 어느 한 쪽에는 거의 절대적으로 불리할 수밖에 없는 시합을 피할 길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처지의 사람들이 놓이게 되는 현실은 끔찍한 것입니다. 경기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이기고 지는 한 점 한 점이 단지 운동시합의 승패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엄연한 현실 앞에서, 우리는 강자와 약자 사이에 벌어지는 운명의 대결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이솝 우화에서도 이런 상황을 잘 빗댄 이야기가 등장하는 것을 기억하고 계실 것입니다. 동네 장난꾸러기들이 연못에 돌을 던지니까 개구리들이 나와서 하는 말이, "너희들은 장난으로 그럴지 모르나 우리에게는 생사가 달린 사태가 벌어졌다"라고 말입니다.
요즈음 미국 부시 정권이 하는 발언이나 행동을 보면, 이 거대한 제국이 우리 민족의 명운에 얼마나 엄청난 영향을 미치는가를 절감하게 됩니다. 연초 국정연설을 통해서 이란, 이라크와 한데 싸잡아서 한반도의 북쪽을 향해 "악의 축"이라고 부른 그는 미국이 위협받기 전 공격할 태세가 되어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그 이후 이러한 기조의 발언은 계속 되풀이 되고 있고, 더욱 강력한 어조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가 이렇게 말하자 세계 도처에서 비난과 항의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습니다만, 미국의 부시 정부가 자신의 입장을 번복하거나 후퇴할 기미는 아직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물론 한편에서는 그냥 엄포다, 국방예산을 더 타내기 위해 그러는 거다, 괜히 너무 과민하게 걱정하지 마라,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그렇다해도 우리 민족의 생명과 평화가 그런 목적을 위해서 이렇게 농단의 대상이 되어도 되는가 하는 문제는 여전히 남습니다. 굳이 꼭 전쟁을 하자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한번 엄포를 해봤다거나 군사비를 증액하기 위해서였다거나 등등 그 정도의 목적을 위해서 이런 식의 폭언과 위기고조를 해도 되는 것인지 심각하게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인간의 생명, 한 민족의 운명을 그 누구도 이렇게 크리켓 시합이나 한판 가볍게 하거나, 그 안에 있는 개구리가 죽든 말든 아니면 놀라든 말든 연못에다가 돌 한번 던져보는 식으로 대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제1막에서 테이블 위에 총을 놓아두었다면
그러나 사실 이러한 부시 정권의 발언과 태도가 그냥 엄포나 국내 정치용이라고 하면서 지나치기에는 상황이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며칠 전 뉴욕 타임즈지의 논설위원인 윌리암 사파이어(William Safire)는 그의 글에서 상당히 두려운 논조를 폈습니다. 윌리암 사파이어는 뉴욕 타임즈지 논설 위원 가운데 가장 보수적이고 군사적으로 강경론을 펴는 인물이라는 점을 우선 주지해야 합니다. 게다가 전반적으로 전쟁정책에는 다소간 거리를 두는 경향이 강한 뉴욕 타임즈지에서 이러한 논조가 나오고 있다는 것은 오늘날 현실이 장난이 아님을 예감하게 합니다.
그는 그의 글 첫 머리에서, "극작가가 제1막에서 테이블 위에 총을 놓아두었다면, 눈치 빠른 관객은 그 총이 연극이 끝나기 전에 쓰여지게 될 것을 안다"라고 썼습니다. 총을 그냥 장식으로 놔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게다가 그는, 전쟁을 우려하는 한국 때문에 미국의 발목이 잡히고 있는데 미국의 우수한 군사력으로 선제공격을 통해 북한을 무력화하면 서울은 북한의 공격 대상이 될 수 없다고 강조했습니다. 미국의 선제공격이 성공할 수 있다는 논리를 내세우고 있는 것입니다. 전쟁을 걱정하는 한국의 입장을 너무 염두에 두지 말고, 미국의 우수한 군사적 능력을 믿고 먼저 치고 나가라는 것입니다. 전쟁을 선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의 글 마지막은, "다음 막에서는 그 총이 불을 뿜게 될 것"이라고 불길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연극을 상징으로 미국의 움직임을 비유했지만, 전쟁이 어디 연극에 비할 바이겠습니까? 강한 자에게는 연극에서 작가의 사전 포석이나 배우의 계산된 움직임에 불과한 정도가 현실에서 그 일을 직접 당해야하는 사람에게는 결코 한가하게 앉아서 그 다음 막이 어떻게 돌아가나 하고 궁금해서 구경하는 장면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알 수 없는 침묵
영국 BBC 방송이 지난 한국전에서 미군이 한반도 도처에서 양민을 학살한 기록을 지난 2월 1일 방영했습니다. 학살이 벌어졌던 현지와 그 유가족들 사이에서는 이미 오래 전부터 알려져 있던 이야기였고, 또 노근리 사건이 AP 통신으로 전세계에 알려지기도 했으나 국제적으로 신뢰가 높은 영국의 공영방송이 이것을 1년간에 걸쳐 조사하여 방영하자 그 여파가 만만치 않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미국 언론들은 그 어느 언론도 BBC 방송의 내용을 보도하지 않았습니다. 완전히 무시하고 만 것입니다.
이것이 참으로 무섭습니다. 인간의 생명을 유린하는 일은 그것이 언제가 되었건, 지탄의 대상이 되지 않을 수가 없고 그 책임을 피해가려는 것은 아무런 양심의 가책이나 반성 없이 그런 일이 다시 되풀이 될 수 있게 된다는 점에서도 그냥 지나치기 어려운 일이라고 하겠습니다. 거대한 강국의 정신이 이렇게 사람의 생명을 함부로 해도 된다는 쪽으로 빠지게 되면, 인류는 심각한 위기와 고통에 시달리게 됩니다. 인간이 인간을 사냥하는 시대가 열리는 것이며 그로써 하나님 나라의 의는 무너져 내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도처에서 이러한 폭력의 위험에 대해 지탄과 항변이 쏟아져 나오고 있어도 한국의 기독교계는 지극히 일부의 작은 목소리 외에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기독교계도 침묵하고 있습니다. 이 문제는 무슨 "반미(反美)"니, "종교의 정치개입"이니 하는 차원의 사안이 결코 아닙니다. 사람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이 십자가에 달리는 것을 마다하신 그리스도 예수의 뒤를 따르는 사람들이라면 마땅히 "이것은 아니다"라고 외치고 폭력의 행진을 가로막고 나서야하는 차원의 과제입니다. 도대체 이 세상의 그 누가, 엄청난 돈과 무기를 준비해서 사람의 생명을 빼앗을 궁리를 하면서 선을 행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지난해 9.11테러 사건이 있고 난 후, 미국의 대외정책은 날이 갈수록 광포해져가고 있습니다. 미국이 가만 두지 않겠다고 지목하는 나라의 백성들은 불안에 떨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과거 로마 황제가 격투기장에서 격투사에게 엄지손가락 하나를 위로 올렸다 아래로 내렸다 하면서 인간의 생명을 농단했던 것처럼 지금 미국은 어느 놈을 작살내나 하면서 오늘은 이 나라, 내일은 저 나라의 이름을 흘리고 있습니다.
현실이 이럴진데 우리가 살고 있는 나라이기에 가만히 있어야 된다는 주장이 과연 정당한 것일까요? 아니지요. 우리가 살고 있는 나라이기에, 더더욱 하나님 나라의 뜻에 합당한 행동과 선택을 하도록 일깨우고 기도하며 행동해야 할 것입니다. 아프가니스탄과 전쟁이 일어났을 때, 미국에 살고 있는 중동과 중앙아시아 사람들은 곤욕을 치루었습니다. 이들은 졸지에 미국인들에게 적이 된 것이었습니다.
만일 한반도에서 또다시 전쟁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한반도 민족 전체의 명운 만이 아니라 이곳에 살고 있는 우리 동포들과 아시아인들에게 예상할 수 없는 재앙을 가져다 줄 수 있습니다. 이곳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미국의 전쟁을 지지하고 한반도가 하루 속히 쑥대밭이 되어 전쟁이 끝나기를 바래야 하는 입장에 서게 될 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이러한 현실은 미국의 역사에서 결코 유례가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이곳에서 평화롭게 살고 있던 중국인들이, 일본인들이, 독일인들이, 베트남인들이 창졸지간에 겪었던 생생한 현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의 힘이 버티고 있는 자리
너무 우울하고 걱정되는 이야기만 하고 만 것 같습니다만, 기독교인으로서의 종교적 양심과 지난 1백년간 주변의 강대국들의 등살에 시달려온 우리 민족의 고난에 대한 민족적 양심을 가지고 오늘의 현실을 보면, 마음이 절통해지지 않을 수가 없게 됩니다. 그러나 상황이 아무리 암담하고 어둡다해도 기독교 신앙인들의 자세는 언제나 그 위기의 현실을 생명의 힘으로 돌파해나가는 것에 그 빛남이 있습니다.
세상이 희망을 잃고 낙담해 있거나, 세상이 가야할 길이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해 방황할 때에, 바로 빛이 되고 길이 되는 존재가 우리들 신앙인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그래서 우리를 향해 "너는 세상의 빛이다", "너는 세상의 소금이다"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가시다가, 중도에서 광풍이 일어 배가 큰 파도에 휩쓸려 난파의 위기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이제 죽게 생겼다하고 난리가 났습니다. 하지만, 기이하게도 예수님은 그 요동을 치는 배에서 평안히 잠을 자고 계셨습니다. 광풍이 그의 잠을 깨우지 않았고, 풍랑이 그의 평안을 건드리지 못했던 것입니다.
자칫 죽을 지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떨고 있던 제자들에게 예수께서는 두 가지를 짚어 말씀하셨습니다. 첫째는, 왜 무서워하는가? 둘째는 믿음이 적구나. 즉, 두려움은 믿음이 무너지는 첩경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두려움을 느끼는 대상의 힘을 더욱 믿는 것이 두려워지는 마음의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두렵다는 것은 그저 공포의 심리적 현상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영혼이 어떤 힘의 위력을 더욱 강하게 믿고 있는가를 말해주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지금 자신들이 타고 있는 배를 향해 덮쳐오고 있는 광풍과 풍파의 힘을 압도적인 것으로 믿고 있기 때문에 무서워지고 있는 것입니다.
반면에, 예수께서는 그 바람과 파도의 힘이 그를 집어삼킬 수 없다고 믿고 있기 때문에 평안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에서 광풍은 인간의 힘을 넘는 차원의, 통제되기 어려운 현실의 위세를 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명의 능력에 자신을 거는 사람들은 이 위세에 주눅이 들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주눅이 드는 순간, 이미 그의 마음과 영혼은 무너져 내려서 파도가 배 안으로 덮쳐들기도 전에 까무라쳐 스러지고 말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그 자신의 생명이 바람과 바다에 노출되어 있어도 여전히 하나님의 생명의 장중에 있음을 확신하는 일입니다. 여기에서 벗어나면 그 어떤 안전한 곳도 험곡이 되며,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그 어떤 험곡도 평탄한 곳이 됩니다. 그 거대한 바람과 휘몰아치는 바다도 어찌하는 수가 없는 지점, 그 한계는 오로지 하나님의 생명의 힘이 버티고 있는 자리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일깨우신 것은 바로 그 자리에 우리가 있으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민족을 향해 그 어떤 파도가 덮쳐올 지, 그것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게 될 것인지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무슨 일이 일어난다 해도 우리 민족의 생명이 하나님의 은총 안에 보호받게 되기를 빕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경계선
영화 <라간>의 마지막 장면은 다음과 같습니다. 필사의 힘으로 크리켓 경기를 하던 인도의 마을 팀은 가까스로 최후의 한 점을 남기고 있는 힘을 다해 크리켓 방망이를 휘둘러 공을 쳤습니다. 홈런인가 했더니 상대편 영국군 장교가 그 공을 잡은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경기가 영국군의 승리로 끝나는가 했더니, 그장교가 공을 잡은 자리는 경기장 바깥쪽이었습니다. 공은 손에 넣었으나 경기에서는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정작 승패는 이렇게 결정됩니다.
배 안을 향해 몰아치는 폭풍, 그러나 그 바람, 파도와 배 안의 사람들 사이에 "눈에 보이지 않는 경계선"이 있습니다. 거센 풍파가 우리를 삼킬 듯 하지만, 우리의 생명이 하나님의 생명, 그 경계선 안에 있으면 그 무엇도 우리를 위험에 빠드릴 수 없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를 위협하는 것들은 더 이상 우리를 어쩌지 못하고 조용히 가라앉고 맙니다. 이런 일을 이루는 능력, 우리에게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교회가 거대한 역사의 풍파 앞에서 흔들리는 쪽배와 다를 바 없어도 이 시대의 양심이 되기를, 이 세상에 휘날리는 생명의 깃발이 되기를, 그래서 도처에서 인간의 생명을 집어삼킬 듯한 바람과 파도를 잠잠하게 하는 그런 구원의 능력을 뿜어내는 하나님의 집이 되기를, 우리 각자가 그런 존재가 되어가기를 진심으로 비는 바입니다.
김민웅 (2002-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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