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죽음을 안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들의 이름을 호스피스라고 합니다. 호스피스 최화숙 박사의 이야기입니다
대부분 시한부 판정을 받고나면 처음엔 사실을 부인하려고 합니다. 그럴리가 없다는 겁니다. 그리고는 ‘왜 하필 나인가’ 화내기 시작합니다.
자신을 살려주기만 하면 정말 착하게 살겠다고 하나님과 협상도 벌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곧 죽으리라는 생각으로 절망과 좌절에 빠졌 마침내 포기하는 마지막 단계에 이릅니다.
이때 내세를 믿는가에 따라 죽음을 맞는 자세도 큰 차이가 있습니다.
불신자는 이것이 끝이라고 생각하는 두려움과 절망과 슬픔과 초라한 모습에 어둡습니다.
그러나 부활을 믿는 사람들은 편안하게 임종을 맞는 다는 것입니다.
어느 부인은 대학등록금만 도와달라던 손아래 시누이의 절박한 애원마저 매몰차게 거절하며 남편과의 세계일주를 위해 악착같이 돈을 모았던 말기 암환자는 모았던 여행비를 채 손도 대보기 전에 암 말기 판정을 받았다.
세상을 떠날준비를 하며 그녀를 가장 고통스럽게 한 것도 너무도 지독하게 돈에 집착했던 삶과 그로 인해 친척들에게 못할 짓을 많이 했다는 후회였다고 합니다.
‘이대로 죽긴싫다’는 본인의 절규와 집착도 대단했으며 예정된 운명을 되돌리려고 갖가지 민간요법 등을 동원하는 등 끝까지 미련을 포기하고 고통스러워하면서도 끝까지 죽음에 저항했던 그녀는 임종 순간에도 두 눈을 부릅뜬 채 ‘안 돼!’ 소리를 질렀지만 더 이상 이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임종자들은 검은 옷을 입은 사람 여러명이 자꾸만 자신에게 나타난다며 소리를 지르는데
무엇이 그렇게 무섭냐고 묻자 지옥에 갈까봐서’라고 간신히 대답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의 인생은 죽음을 죽음에 대비하는 자세 필요가 필요합니다.
“아름답고 행복한 죽음이란 것도 가능한 것입니다.
이대 총장이었던 김활란 여사는 슬퍼하지 말고 기쁜 찬송을 부르라고 하였습니다.
“아름답게 죽는 방법은 부활 신앙의 믿음으로 사는 것뿐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메시지는 <천국>에 관한 메시지입니다.
천국보다 더 아름답고 우리의 마음을 더 기쁘게 하는 말이 또 어디에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최초로 설교하신 말씀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까?
우리에게 천국을 선물로 주시기 위해서 돌아가셨습니다.
왜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셨습니까?
우리가 갈 천국을 마련하기 위해서입니다.
천국을 마련하면 너희를 데리러 오겠다고 하셨습니다.
천국은 기독교의 복음의 시작이요, 마지막입니다. 천국은 기독교의 전부입니다.
34절에서 "하나님 나라에서 멀지 않다"는 말은 죽음을 앞둔 우리의 인생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선택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 안에"있든지 "그 나라 바깥에"있든지 둘 중 하나입니다.
그 중간지역은 없습니다.
오늘날의 비극은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를 매우 모호한 것으로 생각하는데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 "하나님 나라에서 멀지 않다"는 말은
다시 말해서 분명히 "하나님 나라"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분명하게 정의되어 있으며, 그곳으로 들어가는 그 문은 좁은 문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한 사람씩 들어 갑니다
구원은 개인적인 것입니다. 믿는 가정의 이라고 해서 불신 남편도 따라서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여러분 한 분 한 분씩 대면하여 볼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각자가 행한 대로 다루실 것입니다.
본문에 서기관과 주님과의 대화에서
"네가 하나님 나라에 멀지 않도다"는 주님의 말씀은 칭찬의 말입니다.
지혜있게 말한 것을 칭찬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서기관은 하나님 나라 바깥에 있습니다.
아무리 지혜롭고 선행을 베풀어 칭찬을 들은들 택한 백성이 못되면 그는 결코 하나님 나라 안에 있지 않습니다.
바울은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롬 2.13)라고 말했습니다.
오늘날 하나님 나라 문턱에 서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원리는 사랑입니다.
하나님 사랑의 반대는 자기 사랑입니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자기 사랑, 자기 만족, 자시 성취를 위해 싸우고 서로 착취합니다. 자기라는 우상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하나님에 속한 사람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김의 삶을 삽니다.
욕심으로 근심하기 보다 희생하고 주는 삶을 삽니다.
요한 Wesley는 1703년, Susanna Wesley의 15번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유능하고 헌신된 어머니 Susanna의 영향으로 옥스퍼드 대학에서 교수가 되었을 때
Wesley는 아직도 거듭난 사람이 아니었지만
1738년 5월 24일 드디어 Wesley는 잊을 수 없는 일을 당하게 됩니다!
우연히 성경을 펴서 그가 본 구절이
오늘 본문 마가복음 12장 34절,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 멀지 않도다"이었습니다!
Wesley는 이 구절이 그에게 구원에 확신을 주었다고 말했습니다.
이 구절은 평생 그의 일생에 있어 기억하는 구절이 되었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 멀지 않도다"가 되었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 멀지 않도다"라는 주님의 말씀과 함께 주님을 만난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축복이며 또한 경고이기도 합니다.
비록 하나님 나라에 가깝긴 해도 하나님 나라와 분명히 분리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이 행동이 없는 확신은 죽은 믿음입니다.
우리는 머뭇거리는 습관을 버려야 합니다.
예수 안으로 들어가거나 떠나거나 우리는 선택해야 합니다.
바른 신앙은 여호와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믿고 힘차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세상은 광야와 같습니다.
이 험한 세상을 살다가 최후에 도달할 안식처가 어디입니까?
우리의 인생은 갈곳을 모르고 태어난 나그네 인생입니다.
이제 우리가 가야될 곳은 바로 천국입니다.
이 세상 모두가 하나님의 것입니다. 내 것이라고 주장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것을 알고 살아가는 사람은 후회가 없고 복된 인생을 살아가게 됩니다.
예수님의 삶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주님은 어느 것 하나를 내 것이라고 말한 적이 한번도 없었습니다.
있다면 모든 것이 다 아버지 하나님의 것이라 하셨습니다.
자식도 아파트도 가정도 교회도 내것이라고 생각하면 비극이 시작됩니다
영적으로 무소유의 빈 마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이 땅은 우리가 잠시 지나갈 광야길입니다
(4단지 재개발 이야기)
우리의 인생은 나그네와 같은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구원받았으나 아직은 성화 중에 있는 순례자입니다.
순례자란 겸손한 뜻을 보여줍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들의 이땅에 삶은 나그네와 같이 살아가는 순례자입니다.
순례자는 잠시 지나칠 것에 메달리면 안됩니다.
하나님 나라를 목표로 살아가는 순례자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말씀에 갈대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갈대란 바로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은 갈대와 같습니다.
세상은 바람이 부는 광야입니다. 생각지도 못하는 방향에서 바람은 불어옵니다.
갈대는 바람이 불면 바람 부는 곳으로 쓰러집니다. 이리 저리 흔들립니다.
이런 소문 저런 소식에 맑았던 우리 마음이 금새 어두워지기도 합니다.
무슨 일이 나려는 것 아냐?
사람의 마음은 참 약한 것입니다. 좋다가도 금방 근심과 걱정을 합니다.
주님은 세례요한에게 그랬던 거처럼 우리를 두고 책망하십니다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갈대를 보려더냐?
우리는 무엇을 찾아 광야에 나갑니까?
광야와 같은 세상에는 바람에 밀려 흔들리는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세상의 욕심이나 세상의 부귀영화를 기대하다가는 실망하고 맙니다
갈대처럼 사람들은 약한 존재입니다.
그것을 너무도 잘 아시기에, 우리를 징계하시지 않으시고 오래 참으시며 긍휼히 보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광야에서 무엇을 찾습니까?
광야에서 외치는 주님의 음성을 듣기 바람니다
여러분 주님의 세미한 음성을 듣기 바랍니다
여러분 조용히 내면으로 흐러 나오는 성령의 소리를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고통 가운데 있을 때에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고 당황할 때도 좋습니다.
그때 조용히 내면에서 들리는 소리를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이런 소리를 들으실 것입니다.
"태초에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으니 너는 내 것이라. 또 내가 너의 것이라.
너는 내 사랑하는 자요 내가 기뻐하는 자라.
나는 한없는 부드러움으로 너를 보고 있고, 친밀한 보살핌으로 너를 돌보고 있느니라. 난 네 머리카락도 다 세었고 너의 모든 발걸음을 인도하고 있느니라.
네가 어디를 가든 내가 너와 함께 하고, 네가 어디서 안식하든 내가 지키리라"
오늘 우리는 주님이 어떤 분인지를 새롭게 알게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은 병든 자를 치유하신느 분이십니다.
15절에 말씀에 "예수께서 저희 병을 고치시고"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많은 병자를 고치셨습니다.
주님 앞에 와서 치료받지 못하고 돌아간 사람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셨다가 나면서부터 한편 손이 말라 있는 불쌍한 사람을 보시고 고쳐 주셨습니다.
주님은 언제 어디서나 병든 자를 보시면 그냥 지나치지 않았습니다.
병원에 가면 무슨 환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마8:17절에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성령의 은사가운데 치유사역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추상적인 하나님의 나라만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건강하게 사는 법을 가르쳐 주셨고 친히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병고치려면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주님을 만나려면 철저히 회개함으로 어린아이 같은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대부분의 병이 마음에서 오는 것들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만나 복음을 듣고 마음이 치유되면 육신의 병까지 치유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아시고 거기를 떠나가시니"라고 했습니다.
복음도 좋지만 치유도 좋지만 선한 사업도 좋지만 다투면서까지 그곳에 머물러 계시기를 원치 않으셨습니다.
항상 무엇이 중요한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중요하지 않는 일에 목숨을 거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별히 한국인에게 그런 기질이 많습니다.
대부분의 살인 사건은 그렇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때로 있는듯 없는듯 해야 합니다.
일을 크게 벌리기 보다 자신이 먼저 큰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큰사람이 되어야 큰일을 할수 있는 것입니다.
비올 때에 빗물을 받기위하여 작은 작은항아리를 여러개 놓는 것 보다
큰 항아리를 내 놓아야 비를 많이 받습니다.
큰강은 소리가 잘 안남니다.
자신을 나타내는 것을 싫어하신 주님이십니다.
16절에 말씀에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라는 말이 있습니다.
큰 일을 행하시고도 그런 이야기를 나타내지 말라고 말씀하신 주님의 모습 속에서 우리는 그의 온유하시고 겸손하신 인격을 보게 됩니다.
세상사람들은 남이 잘되면 시기하고 질투와 모함과 원망과 중상 모략합니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에게 자랑해서 칭찬들으려 하지 말고
하나님의 칭찬을 기뻐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주님이십니다.
18절에 말씀에
"보라 나의 택한 종 곧 내 마음에 기뻐하는 바 나의 사랑하는 자로다 내가 내 성령을 줄 터이니 그가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하리라"
여기서 심판은 진리이신 복음을 말하고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주님은 온 땅에 복음이 전파되게 할 것입니다.
다투기도 들레기도 원치 않으신 주님이십니다.
19절 말씀입니다.
"그가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했다”
들레지도 말은 히브리 말로는 ‘개가 왕왕 짖었다’는 말입니다.
싸우지도 않고 짖지도 아니했고,
없었다, 한 마디로 조용했다는 말입니다.
주님은 나타내기를 실어하실 뿐만 아니라 다투는 것도 싫어하신다고 했다.
그래서 주님은 다투실 일이 있으면 조용히 피하셨습니다.
우리도 다투는 일에는 멀리해야 합니다.
옷에 뭍은 진흙은 마른 다음에 털어야 잘 털리는 것입니다.
여기서 갈대란 연약한 인간을 말하고 있습니다.
열왕기상 14절 15절 말씀에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처서 물에서 흔들리는 갈대같이 되게 하시고"
파스칼은 "사람은 자연 중에서 가장 연약한 갈대니나 생각하는 갈대"라고 했습니다.
인간은 연약한 존재입니다.
인간이 갈대인데 그 중에도 상처 입은 갈대라며 얼마나 연약한 존재이겠습니까?
인간은 상처를 쉽게 입습니다.
바람이 좀 지나가도, 태풍이 불면, 전염병이 지나가도, 전쟁이 나도, 경제가 좀 어려워도, 부부싸움 좀 하고서도, 부모의 말 한마디에 상처를 입습니다.
친구의 충고한 말 한마디에 상처를 입고 평생 원수가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게 상한 갈대와 같은 인생이지만 주님은 버리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상하고 실력 없으면 한 순간에 배신하고 업신여기고 떠나갑니다.
실력 없다고 생각하면 인정사정 없이 짓밟아버리는 것이 세상 인심입니다.
시편 147편 3절 말씀에
"하나님은 상한 심령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 하시도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 가운데 상한 심령이 있습니까?
통회 자복하는 심령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실 것입니다.
사람은 상처 입기에 너무 쉬운 연약한 자입니다.'
'작은 말 한마디에도 큰 상처를 입는 것이 인간입니다.'
어느 사모님의 수기입니다
"남편은 하늘이라 말하고 아내는 땅이라고 말하는데,
우리 남편은 비 한 방울 내리지 못하는 원망스런 하늘이었고,
땅은 메마르고 갈라지고 있는데도 그 사정을 모르는 무심한 하늘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비 한 방울 내리지 않는 하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새로운 하늘로부터 내리는 은혜의 단비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처럼 새 하늘로부터 단비를 받았기에 저의 심령은 사막이 되지 않았고
젖과 꿀이 흐르는 새로운 땅이 되어 이제까지 살아 왔습니다."
아마 많은 한국 남편들이 이런 원망스런 하늘이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모습을 삮이고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새로운 하늘이신 예수님이 필요한 존재입니다.
어떤 부부 세미나에서 부부 관계를 새롭게 하자는 말씀을 한 후에
기분 좋았던 일, 나빴던 일을 회상하면서 부부간에 서로 마주 앉아 눈을 맞추게 했습니다.
그래서 약 10분간 눈을 맞추었는데 그때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연구에 의하면 아주 놀라운 사실은 수십 년간 부부생활을 한 사람들도
부부간에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서로 눈을 맞추고 바라본 시간은 총 3분도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부가 정말 사랑하는 마음을 품고 10분간 눈을 맞추고 있기만 해도 눈물을 흘린 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집에 가셔서 아내와 남편과 한번 해보시기 바랍니다
서로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상대방의 눈을 10분 동안 처다보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과 그렇게 눈을 맞출 수 있다면
감격의 눈물이 아니라 사랑의 불꽃이 튀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과 눈을 맞춰서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힘써야 합니다.
꺼져 가는 심지도 끄지 않으신 주님이십니다.
20절 말씀에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라고 했습니다.
상한 갈대가 인간의 연약성을 말한다면 꺼져 가는 심지는
그리스도인들이 사명감이 소멸되어가고 있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양심의 불이 꺼져 가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
신앙의 열정의 불이 꺼져 가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엡5:)
세상에서 어떻게 해야할 것을 보여 주신 말씀입니다.
우리는 처음부터 꺼져 가는 불이 아니었습니다.
처음에는 초롱불이 아닌 화산 같이 용솟음치고 횃불같이 타올랐을 것입니다.
어느 순간에 기름이 부족하기 시작하면서 점점 작은 불이 되고
이제는 작은 바람에도 꺼져버릴까 염려가 되는 꺼져 가는 심지가 되었습니다.
두 종류의 교인이 있습니다.
연기 같은 교인이 있습니다.
연기에는 빛이 없습니다. 불도 없습니다. 타던 불이 꺼지면 연기만 내게 되었습니다. 연기만 있는 곳에는 어둠과 눈물과 염려와 근심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불꽃같은 사람의 믿음에는
빛이 있고 뜨거운 정열이 있고 모든 악한 것을 녹이는 힘이 있고 그래서 주변 사람들을 정금처럼 변화시키는 사람이 있습니다.
불은 자기가 타는것으로 말미암아 빛을 냅니다.
불이 타오르려면
1) 좋은 심지가 있어야 합니다. 좋은 심지는 믿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좋은 심지는 오래 사용해도 변함이 없습니다.
나쁜 심지는 불통이 생겨서 딱딱하게 굳어집니다. 심지가 굳어지면 잘라내야 합니다.
2) 좋은 기름을 좋은 기름은 말씀을 말하는 것입니다.
기름속에는 오염물질이 있고 물도 섞여 있습니다.
말씀도 잘못된 말씀이 있습니다. 좋은 말씀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 사켰다.
출애굽은 구원을 의미합니다.
그 다음에 홍해바다 앞에서의 절망이 있었고 광야길이 있었지만
그것은 과정이었고 결론은 가나안 복지였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실 때는 이미 결론까지 정해놓고 부르신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어려움이 올지라도 하나님은 시작과 결론을 알고 있습니다.
임마누엘에 대한 믿음을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이유는 실패하고 굶으라고 하시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 임마누엘입니다
임마누엘이란 배경과 근원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업도 일도 장래도 사사건건 내가 걱정해 보지만 결론은 하나님이 이미 지었습니다.
여러분 문제를 걱정하기 전에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먼저 세우시기 바랍니다.
불신자 앞에서 또한 자녀들 앞에서 특별히 본을 보여야 합니다.
어떤 문제를 당해도 염려하기 보다 먼저 아버지의 사랑과 능력을 깨닫기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갈대는 흔들리는 사람들의 마음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바람에 흔들리고 휘어지더라도 그 뿌리째 뽑히지는 않는 것은 하나님이 붙잡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에 믿음을 주셨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상황에 따라 흔들리기도 하지만 그러나 결코 꺽이거나 쓰러지지 않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켜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상한 갈대를 꺽지 아니하시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신다고 하였습니다.
살다보면 마음 상하는 일도 많습니다. 그로 인하여 때로는 우리의 믿음도 흐려지고 희망도 없어지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갈대를 잡으신 것처럼 우리를 잡아 주십니다.
그리고는 오래 참아 주십니다. 기다려 주십니다.
바람이 붑니다. 그러나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주께서 우리를 잡으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우리의 믿음이 장성하여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는 믿음이 되어야 할 때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믿어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 안에 심판 받아야 할 것은 혈과 육입니다.
먼저 자기자신을 말씀으로 심판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서 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위대한 걸작품입니다. 소중한 사람입니다.
쓸모있는 존재이며 너무나 귀중한 존재입니다.
갈대와 같이 흔들리는 우리의 체질을 아시고
아버지께서는 우리의 뿌리가 되어 주시고 우리 믿음의 기초를 잡아주시었습니다.
자기를 멸시하지 마십시오. 자기를 학대하지 마십시오. 자기를 미워하지 마십시오.
자기를 존중하십시오. 자기 가족을 책임지고 가정을 보호하십시오.
자기가 속한 교회와 직장과 모든 것을 사랑하십시오
우리는 누군가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책임을 져야 합니다.
진정으로 가족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책임져야 할 일이 있습니다.
왜 책임져야 합니까?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책임지지 않는 것은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내가 나를 사랑한다면 내 인생에서 내가 책임져야 할 부분을 내가 감당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는 것은 내가 책임저야 될 부분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우리가정이 천국을 이루는 것이요 신앙을 유산으로 남겨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광야에 있는 세례요한에게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라고 하신 적이 있습니다.
광야길에서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 너는 내가 지키고 보호하는 천국 백성이니라
너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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