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교회 생활을 할 때 저의 생활은 핍박 그 자체였
습니다.
당시에 동도교(일명 삼덕교로 요즈음 증산도와 비슷함)에 심취해 계셨던 아버
지와 어머니는 언제나 교회에 출석하는 저를 못마땅해 하셨고 그러니 자연스럽
게 교회생활이 원만하게 될 수 없었습니다.
언젠가 초겨울 토요일 오후에 교회학교 학생을 위한 공과 준비를 하고 있었는
데 아버지는 강 건너 밭에 고추나무를 뽑으러 가자는 것입니다.
주일에 밭갈이를 해야 하는데 토요일 중으로 그 고추나무를 다 뽑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때 고추나무는 화목으로도 사용되기도 했는데 요즈음처럼 장갑도 없이 헝겊
을 손에 감고 그 말라 딱딱한 고추나무를 뽑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습니
다.
문제는 그것이 아니라 교회 나가는 것을 싫어하셨던 아버지께서 일부러 그 날
을 잡아 밭갈이를 하시겠다는 거였는데 그것을 토요일에 다 뽑아야 한다는 것은
어림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결국 토요일에 다 뽑지 못하면 주일 아침에도 그것을 뽑아야 된다는 계산이 있
기에 아버지는 그렇게 저로 하여금 주일 성수를 간접적으로 방해하셨던 것입니
다.
그래도 저는 그 고추나무를 뽑아야 했고, 초겨울이지만 손이 터지고 추위에 얼
마나 힘들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주일을 성수하기 위해서는 그런 고난쯤이야 마땅히 참고 견뎌야 하는
것으로 당연시하였기에 한밤중까지 결국 그것을 다 뽑았습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온몸에 몸살기를 느끼고 누웠는데 아침에 도저히
일어날 수 없었습니다. 신열을 참으면서 억지로 일어나 예배당에 들어서는 순간
온몸에 전류처럼 흐르는 주일 성수의 감격으로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고 예배를
드리고 난 이후의 몸은 거짓말처럼 가볍게 되어 성령님이 치료해 주심을 경험했
습니다.
그것은 주일 성수의 의미와 축복이 담긴 경험이었습니다.
주일 성수와 관련된 이야기가 어디 이뿐이겠습니까만 요즈음에 이르러 교인들
의 주일 성수 개념이 너무나도 흐트러지는 것을 보면서 우리 믿음의 선배들의 신
앙생활을 새삼 생각해 봅니다.
주일에 대한 이해
오늘 본문은 안식일에 예수님이 손 마른 사람을 치료하신 사건입니다. 당연히
당시의 사람들은 어떻게 안식일에 이렇게 할 수 있느냐 하는 의문이 제기되었습
니다.
이 상황에 예수님의 행위는 분명했습니다.
그 사람의 마른 손을 치료하시고 난 후 자신을 송사하려는 사람들을 향하여 이
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사람들은 대답을 할 수 없었습니다.
이 사건에서 우리는 진정 주일 성수의 의미를 깨닫게 됩니다.
지금은 타지역으로 가셨지만 포항 등외과 원장으로 근무하시던 박해한 집사님
은 항상 비퍼를 진동으로 하여 예배를 드렸습니다. 응급환자가 병원에 올 때는
예배 중에도 조용히 나가서 응급환자를 진료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늘 미안해하는 박 집사님께 제가 드린 말씀이 있습니다.
“절대 미안한 마음 갖지 말고 그 직에 충실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더 원하시는 것을 깨닫고 감사함으로 사역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교회에도 의사선생님들이 많이 계십니다.
주일에도 진료해야 하는 문제는 그들의 고민일 수 있습니다. 문제는 진료 행위
가 자신의 의료수익을 위한 것이냐 생명을 살리는 것이냐 입니다.
정직한 신앙양심으로 의료수익을 위한 진료행위는 안 됩니다. 그러나 죽어 가
는 생명을 살리기 위한 진료행위는 가능한 것입니다.
그것이 복음입니다.
곧 복음은 사랑이며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보편적으로 주일은 노는 날로 이해하면서 주일을 보내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쉬는 날로 이해하면서 하루 종일 방안에서 이리 뒹굴 저리 뒹굴 하면서 보내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이 날을 주님의 날로 이해하면서 주님께 영광을 돌리고
주님을 기쁘시게 하면서 하루를 보냅니다.
그렇다면 진정으로 주님의 날을 의미 있게 보내는 것은 어떤 것인가?
사람을 위한 주일
지난번에도 말씀 드렸지만 주일은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지 주일을 위해 사람
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주일을 위해 사람이 있는 것으로 이해하고 가르치고
지켰기때문에 그들의 삶은 복음, 곧 사랑과 생명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라”고 하시면서 “사람이 안식일
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라”고 깨우쳤습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주일 성수의 근본은 사람을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1~2절 말씀 내용은 손 마른 사람을 향한 회당에 있는 사람들의 관심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안식일에 회당에서 손 마른 사람의 그 가련함보다는 예수
가 그를 치료할 것인가 아닌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습니다.
이 사실 자체가 이미 안식일의 의미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아신 예수님은 대적자들의 입을 막아버리는 질문을 하신 것입니다.
4절입니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이 질문은 논쟁의 주도권을 갖고 있는 역질문으로서 대적자들이 다음 말을 할
수 없도록 만드신 탁월하신 말씀이었습니다.
“안식일에 병자를 치료하는 것이 옳으냐 그르냐?”로 질문을 했다면 바리새인
들은 당연히 “그르다”라고 대답을 했을 것인데 예수님의 “안식일에 선을 행하
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라
는 질문 앞에서는 그들은 대답을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일성수의 기본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메시지입니다.
곧 주일은 사람을 위한 것임을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저의 목회 철학의 기본이 요한복음 10:10절을 중심으로 한 ‘생명이 풍성한 교
회’인 것은 여러분도 잘 아실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사역의 중심이고 교회의 참모습입니다. 그렇게 치료하고 양육
하고 선교하는 3대 기본 정신을 엮어서 우리 교회의 오늘이 있게 된 것입니다.
이 모두 사람을 위한 복음사역의 중심내역입니다.
주일성수도 율법적으로 지키면 안 됩니다. 복음적으로 주일을 성수해야 합니
다.
5절에 기록된 것처럼 바리새인들은 마음이 완악하여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지
못했고 그러기에 무감각한 양심, 사랑이 없는 황폐한 마음, 자기도취에 빠진 편
견으로 이기주의에 깊이 물들여진 사람들이기에 손이 말라 고통받는 사람에 관해
서는 관심도 없고 오직 자기들의 소욕을 이루기 위한 것에만 관심을 가졌던 것입
니다.
그래서 주님은 안식일에 선행과 생명을 구하는 일을 말씀하시면서 잘못된 바리
새인들의 안식일관을 깨우친 것입니다.
곧 선행과 생명을 구하는 일이 곧 주일 성수의 진정한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늘 말씀드리는 것이지만 주일에도 한 사람이 이것저것 많은 일을 맡아
서 하다 보면 몸도 마음도 지쳐 오히려 진정한 안식의 기쁨을 잃어버리는 경우
도 있습니다.
그래서 1인 1사역 운동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거룩하고 복된 주님의 날에 주님이 주신 달란트를 잘 다듬어 주님께 드리는
봉사와 헌신을 통하여 진정 주일의 감격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이 주일 성수의 진
정한 의미이며 축복입니다.
회복이 이루어지는 주일
5절 하반 절입니다.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그가 내밀매 그 손이 회복되었
더라.”
참으로 주일 성수의 깊은 의미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손 마른 사람을 치료하시는 예수님을 송사하려고만 했지 손 마
른 사람의 고통에 관해서는 관심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관심은 언제나 가난하고 병든 연약한 자들에게 있었습니다.
주님은 그 사람에게 손을 내밀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치료를 위한 축복의 메시지입니다.
그것은 회복을 위한 초청의 메시지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은 지금도 우리에게 주어지는 주님의 사랑의 권고입니다.
그 사람은 손을 주님 앞으로 내밀었습니다.
주님은 그 손을 치료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손 마른 사람의 상태를 보다 세심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1절을 보면 ‘한 편 손 마른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누가복음에서 ‘오른 손’이라고(눅6:6) 표현한 것은 오른 손은 힘의 상징인
데 그 사람의 상태가 더욱 절박했던 것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손 마른 상태를 묘사한 헬라어는 ejxhrammevnhn(엨세람메넨)인데 이 단어가 갖
는 의미는 그 신체 장애가 선천적이라기보다는 후천적인 것으로 활동력이 상실
된 상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 모두에게 해당되는 용법이라는 것
을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들의 손은 어떠합니까?
본문의 사람처럼 손이 말랐지 않습니까?
손이 말랐다는 것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돈이 있어도 헌금하지 못합니다. 건강해도 봉사하지 못합니다. 즉 있어도 할
수 없는 상태인 것입니다. 한 마디로 슬픈 상황입니다.
손은 있지만 쓸모 없는 손, 활동할 수 없는 손, 수고하지 못하는 손, 그 손을
주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내밀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언제 이루어지는가?
안식일에 이루어졌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진정한 주일 성수는 모든 것이 회복되는 축복의 날임을 시사하는 것입니다.
손만 회복되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상한 마음도 회복되어야 합니다.
아픔도 상처도 분노도 원망도 불평도 회복되어야 합니다.
죄와 허물로 찢어진 삶도 회복되어야 합니다.
가족 상호간의 갈등과 불화도 회복되어야 합니다.
사업도 회복되어야 하고 사회 윤리도 회복되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정으로 주일 성수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자기 고집을
부리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입니다.
6절 말씀입니다.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곧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꼬 의논 하니
라.”
이미 그들은 화인 맞은 양심의 소유자들이었습니다.
아무리 복음을 설명해도 수용하는 자세가 되어 있지를 않았습니다. 오히려 진
리를 난도질하고, 선을 황폐케 하고, 의를 못질하려고 몸부림을 하였습니다.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꼬 의논 하니라.”
참으로 무서운 마음들입니다. 화인 맞은 양심들입니다. 깨우쳐도 깨닫지 못하
고, 회개를 촉구해도 더욱 죄를 짓고자 하는 데 혈안된 모습입니다.
그것은 그 때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진실을 역설하고, 선을 행하며 의를 촉구하여도 그것이 자기에게 유익하지 못
하고 자기에게 손해가 된다고 판단할 때 그들은 또 다른 모함을 하고 죄를 획책
합니다.
그래서 오늘도 진리가 난도질당하고 의가 못질을 당하고 선이 수모를 당하기
도 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곤혹스러운 것은 거룩한 주일에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경우도 있다는 것
입니다.
주일에는 화해와 사랑과 생명과 기쁨이 충만해야 하는데 거룩한 주일에 예배
행위는 있어도 예배드림은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님께 드림이 없는 예배는 자기를 위한 기만과 속임일 뿐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예화 사전에서 가져온 이야기입니다.
보스턴 지역에서 A. J.골든 목사라고 하면 유명한 설교가요, 능력 있는 말씀
의 사도로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는 큰 교회 담임목사였기에 설교하는 데에만도 많은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
다.
어느 날 그는 교회 목사 사무실에서 힘을 들여 설교를 준비하다가 피곤하여 그
만 의자에 앉은 채 책상에 엎드려 깜박 잠이 들어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꿈속에서도 주일이 되어 교회는 의자가 모자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앉아 있었는데 그 교인들 가운데 30세 정도의 낯선 사람에게 왠
지 모르게 시선이 끌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배가 끝난 다음에 그 낯
선 사람을 만나보고 싶었습니다. 교인들이 목사와 인사를 나누고 다 교회 밖으
로 나갔는데 그 낯선 사람이 보이지를 않았습니다. 골든 목사는 안내위원들에게
그 낯선 사람을 아느냐고 물어보았더니 그 안내위원이 하는 말이 “아. 그 사람
요, 알고 말고요 그 사람은 예수라고 하는 사람입니다ꡓ라고 답하는 말에 깜짝
놀라 깨어보니 꿈이었습니다.
그 다음부터 골든 목사님은 회중 가운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앉아 계신다고 믿
고 설교를 했고, 교인들도 예수님을 중심에 모신 것으로 알고 생활을 했습니다.
교회는 부흥했고 많은 선교사업을 하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오늘 거룩한 주님의 날, 지금 여기에 주님이 함께 계십니다.
그리고 여기에 함께 하신 예수님은 지금도 말씀하십니다.
“네 손을 내밀라.”
이 말씀 안에 담긴 메시지, 곧 주일 성수는 사람을 위한 선행과 생명을 구하
는 것이 중심이 되어야 하고, 모든 망가진 것의 회복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것이 곧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주일성수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아
멘.
Copyright by 본 설교신문 자료를 다른사이트로 무단복사 절대금합니다(추적장치가동)/설교신문//이새롬/사업자번호220-09-65954/서울시강남구도곡로1길14삼일BD1121호/통판:서울강남01470/문자로 질문바람010-3761-0691/E-mail:v919@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