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매력’이라는 말은 ‘마음을 끌어당기는 힘’을 뜻합니다. 여기에는 말의 매력, 행동의 매력, 아니면 미모의 매력, 삶의 매력, 사상의 매력 등이 함께 연결되어 관계하고 있습니다. 2000년의 장구한 세월이 흘렀는데도, 이 세상에 왔다가 십자가에서 저주의 죽음을 당한 예수를 왜 그토록 사람들이 좋아하며 따를까? 아니 그를 위하여 순교에까지 이를까? 그것을 우리가 일반적인 말로 표현한다면 예수에게는 ‘매력’이 있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사람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힘이 그에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예수에게는 우리 사람들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다고 하였습니다(사 53:2). 그런데도 예수를 구주로 영접한 자들에게는 예수야말로 우리 인생의 전부가 되고 맙니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의 삶속에 주어진 날(시간)도 주를 위하여, 식음(食飮)도 주를 위하여 존재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라고 하였습니다(롬 14:6~8). 그는 또 말하기를 내가 사는 것은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 2:20)고 할 정도입니다. 그것은 예수에게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전 삶에 ‘총체적 매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시간에는 ‘예수에게 있는 용서의 힘은 실로 위대한 매력입니다.’라고 하는 사실을 생각하기 원합니다. 제자 중 베드로가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마 18:21)라고 하였습니다. 그 당시 랍비들이 세 번까지 용서하고 그 이상은 말라고 가르쳤던 것에 비하면, 베드로의 이 질문은 여유를 갖고 나타낸 것처럼 여겨집니다. 주님은 형제가 나에게 범한 죄에 대한 교훈을 세 가지 경우에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 합치면 ‘용서’라는 말로 집약됩니다.
Ⅰ. 회개하는 사람은 용서해야 된다고 하였습니다(마 18:15~20).
제일 먼저 나와 그 사람, 곧 범죄한 형제간의 문제라고 하였습니다(마 18:15).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마 18:15),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마 18:15)라고 하였습니다. 그 형제가 회개할 때에 용서함으로, 형제를 잃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다음에는 만약 듣지 않으면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증참케 하라고 하였습니다(마 18:17). 그때에 회개하면 용서하라고 한 것입니다. 세 번째 단계는 그 두세 사람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공적으로 처리되는 과정입니다(마 18:17). 그리고 교회의 공적인 권고도 듣지 않을 경우에는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고 하였습니다(마 18:17). 물론 이 말도 그를 용서하기 위함입니다. 교회 권징의 목적이 그를 내어버림이 아니고, 그로 하여금 수치를 느끼게 하고 회개하게 하기 위한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용서에는 ‘회개’가 전제되어 있음을 봅니다.
Ⅱ. 용서의 정도는 무한, 곧 얼마든지 용서하라고 하였습니다(마 18:22).
형제가 범죄하면 몇 번이나 용서해야 하겠느냐는 베드로의 질문을 받은 예수님은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마 18:22)고 하였습니다.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이 무슨 의미입니까? 수학적으로 풀이하면 490번이 됩니다. 수학적으로 해석을 한다 해도 이것은 굉장한 일입니다. 형제가 우리 개인에게 490번이나 실제적으로 잘못할 수가 있겠는가? 더욱이 490번을 용서하려고 목표를 정하고 용서하고 용서하는 동안 490번이 되기도 전에 그는 성자가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490번이라는 주님의 말씀 속에는 490번보다 더한 무한의 용서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얼마든지 용서하라는 수학 이상의 내용이 숨어 있는 말입니다. 이 무한의 용서에는 ① 즉각적인 용서 ② 많은 용서 ③ 무조건적 용서 ④ 완전한 용서 ⑤ 영원한 용서 ⑥ 다시는 기억지도 아니하는 용서 ⑦ 축복을 비는 용서, 곧 잘 되기를 바라는 용서 ⑧ 중심으로 하는 용서 등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왜 그렇게 용서해야 합니까?
1. 주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그것이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 2장 17절에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고 하였습니다. ‘사죄의 권세’는 예수 자신에게만 있는 생명의 힘입니다.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막 2:10)고 하였습니다. ‘예수’란 그 이름의 뜻이 용서의 은총이요, 표징이었습니다.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마 1:21)고 하였습니다.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고 하였습니다. 2. 주님께서 그 죄인에게 용서받을 믿음과 회개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죄에 대한 용서는 예수님만이 행하시는 초자연적 능력의 은총입니다. 우리 죄를 용서하시는 위대한 사죄의 표적이 십자가입니다. 그 십자가를 믿는 믿음과 회개도 주님 자신께서 은혜와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의 택한 사람들에게 회개와 믿음의 문을 열어 주신 것입니다(행 2:37, 14:27, 15:7, 엡 2:8). 그러므로 자기 죄를 회개하는 자는 벌써 주님의 용서를 받은 자이기 때문에 용서해 주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3. 예수님 자신의 사죄의 기도가 공효를 이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눅 23:34)라고 하였습니다. 이 기도의 효능은 지금도 유효합니다. 로마서 8장 34절에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고 하였습니다. 히브리서 7장 25절에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용서하지 않는 자는 예수님의 사죄 기도를 도전하는 어둠에 빠지는 자가 됩니다.
4. 성령님의 간구가 있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8장 26절에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용서하지 않는 자는 성령의 뜻을 거스르는 어둠에 빠지는 자입니다. 5. 주기도의 응답을 위함입니다. 마태복음 6장 12절에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고 하였습니다. 물론 이 말은 우리가 형제의 허물을 용서해 줄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 말은 우리가 형제의 허물을 용서해 주는 일은 주님께로부터 받은 분부수행이라는 차원에서 한 말입니다. 주기도의 실천을 위해서라도 형제의 허물을 용서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Ⅲ. 용서하지 않으면 내 자신의 죄가 하나님 앞에서 용서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마 18:23~35).
예수님은 이 사실을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일만 달란트나 되는 엄청난 부채를 다 탕감받은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약 6천만 데나리온에 해당되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큰 빚을 탕감받고 나간 그 사람이 자기에게 100데나리온 빚진 동관 한 사람이 그 빚을 다 갚도록 옥에 가두고 말았습니다. 그는 다 갚을 것이니 참아달라고 강청하는 그 사람의 요청까지 거절하였습니다. 이 기막힌 장면을 보았던 동관들이 주인에게 이 사실을 직고하였습니다. 그때 그 주인이 저를 불러다가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하고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저를 옥졸들에게 붙이니라」(마 18:32~34)고 하였습니다.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마 18:35)고 하였습니다. 어떤 임금 되시는 하나님께서 이런 자들을 마지막 날에 회계(계산), 곧 심판하실 것이라고 하였습니다(마 18:23). 바로 자신은 주인에게 평생 갚아도 못다 갚을 빚과 같은 죄를 용서받고서도, 자기에게 잘못한 형제의 작은 허물을 용서하지 않는 자의 받을 벌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것은 실로 잔인한 행동입니다. 파렴치한 행동입니다. 아니 그것은 사실상 큰죄가 되는 것입니다. 형제의 허물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자신의 죄가 하나님 앞에서 용서받지 못하고 심판받을 죄로 남아있다고 하는 예수님의 교훈입니다. 잠언 19장 11절에 「노하기를 더디하는 것이 사람의 슬기요 허물을 용서하는 것이 자기의 영광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잠언 24장 16~17절에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인하여 엎드러지느니라 네 원수가 넘어질 때에 즐거워하지 말며 그가 엎드러질 때에 마음에 기뻐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잠언 25장 21절에 「네 원수가 배고파하거든 식물을 먹이고 목말라하거든 물을 마시우라」고 하였습니다. 고린도전서 4장 12절 중에 「…후욕을 당한즉 축복하고」라고 하였습니다. 에베소서 4장 32절에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라고 하였습니다. 골로새서 3장 13~14절에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라고 하였습니다. 베드로전서 4장 8절에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너의 원수로 인하여 난로의 불을 뜨겁게 지피지 말라. 오히려 그 불이 너 자신을 불태울 것이다!’ 셰익스피어의 말입니다. 마음에 복수의 불을 피우는 자는 그 불 때문에 자신이 망하고 말 것이라는 뜻이 아닙니까? 예수에게 있는 매력이 무엇인가? 우리의 죄를 용서하는 힘이 그 분에게 있다는 사실입니다. 오직 그 분에게만 사죄의 권세가 있습니다. 우리가 왜 그 분을 좋아하고 따르며 사랑하는가? 그 분만이 우리에게 용기와 힘과 미래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만약 베드로에게 그 분의 용서가 없었다면, 베드로가 어떻게 복음의 사도가 되며 이방인들에게 복음의 문을 열었겠습니까? 주께서 그를 돌아보실 때 그는 주의 말씀이 생각나서 울었습니다. 회개하였습니다. 그리고 부활 후에 다시 그를 찾아와 내 어린양을 먹이라고 복직의 축복을 주었습니다. 바울에게 예수 그 분의 이런 용서가 없었다면 어찌 그가 세계의 역사와 지도를 바꾸어 놓는 역사를 이룰 수 있었겠습니까? 그리스도인들은 어찌하여 한평생토록 예수만 위하여 사는 데에 자신의 생존의 목적과 의미를 걸고 있습니까? 그것은 그리스도인 된 우리가 한평생토록 그분에게 용서의 빚을 지고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매력은 용서에 있습니다. 그리스도 교회의 매력은 용서에 있습니다. 그 용서 위에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있습니다. 그래서 무거운 짐진 자들이 다 예수께로 나아오는 것입니다. 예수에게 용서를 받은 사람들만이 예수를 위하여 큰 일을 합니다. 형제의 허물을 용서할 수 있는 사람! 그는 매력적인 사람입니다. 그는 예수의 큰 용서의 축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는 용서하라는 예수의 분부를 실천하는 축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가 형제를 용서해 주었기 때문에 또 그에게 용서받은 형제가 축복을 받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예수에게 영원에 이르는 진노의 죄, 사망의 죄를 용서받은 무리들의 모임입니다. 형제가 형제에게 잘못한 허물을 용서하고 용서받는 무리들의 모임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사랑의 공동체요, 겸손과 온유의 공동체가 됩니다.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형제의 허물을 용서할 수 있는 힘! 바로 그리스도 교회가 세상을 향하여 던질 수 있는 생명의 매력입니다. ‘남의 죄를 감추어 주어라. 하나님은 두 사람 모두 용서해 주리라.’고 하였습니다(탈무드). ‘용감한 사람만이 용서할 줄 안다. 겁쟁이는 서로 용서하지 않는다. 용서란 어리석은 사람의 본성에는 없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글래드스턴). ‘용서는 승리 중에서 가장 신성한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싸이러스). ‘용서는 아름다운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푸볼리우스). ‘그대에게 죄를 지은 사람이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면 무한한 행복을 맛볼 것이다. 우리에게는 남을 정죄하거나 벌할 권리가 없다.’라고 하였습니다(톨스토이). 다시 예수님은 마태복음 6장 14~15절에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고 하였습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 자신의 매력이었습니다. 그에게 무한대의 용서의 은총을 받은 자들이 그를 위하여 감격적인 삶을 바친 족적들이 바로 지상에 존재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 운동입니다. 교회가 이 아름다운 예수의 매력을 발휘할 동안, 교회는 이 세상 중에 가장 위대한 영향력을 보유하고 있는 힘의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예수의 용서의 표적은 바로 예수 자신이 지신 죽음의 십자가가 아닌가! 그 십자가의 용서는 죄인을 향한 예수의 자기 사랑의 결과가 아닌가! 바로 이것은 교회의 교회된 매력이요, 표적이 아닌가! - 아 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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