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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같은 제사장
    2002-07-05 11:31:04   read : 31518

    벧전 1:24-2:6
    이태리 밀라노의 대성당에는 문이 셋이 있습니다.
    첫째 문은 아취로 되어있는데 "모든 즐거움은 잠깐이다."라는 글이 새겨져있고,
    둘째 문은 십자가형인데 "모든 고통도 잠깐이다."라고 새겨졌고,
    셋째 문에는 "오직 중요한 것은 영원한 것이다."라고 새겨져 있습니다.

    인생의 모든 즐거움이나 고통은 다 잠깐입니다.
    긴 인생도 순식간에 지나고 맙니다.

    인간은 영생을 추구하기 때문에 영원히 사는 영생을 얻기 전에는
    아무리 세상에 부귀영화를 누려도 참된 평안과 기쁨을 누릴 수 없는 것입니다.

    헬라의 철학자들은 세상 속에서 변하는 것과 변치 않는 것이 무엇인가를 구별해 보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만물을 자세히 살펴보아도 모든 것이 다 변한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결국 다 변하고 끝이 있는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를 즐겁게 했던 월드컵도 오늘로서 끝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모든 것이 다 변하고 끝이 있어서
    결국은 모든 것이 내게로부터 떠나갈 것이라는 것을 깨달아 알 때
    우리는 겸손할 수 있고 헛된 것에 집착하지 않고 인생을 진지하게 살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먼저 변하는 것이 무엇이냐? 24절에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모든 육체와 풀과 꽃과 영광까지도 다 변합니다.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파릇파릇 싹이 난 풀을 보면 언제나 그렇게 푸르게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어느 새 누렇게 변해 버립니다.

    꽃송이가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지만 며칠있으면 다 떨어져서 초라한 모습이 될 것입니다.
    인생도 그와 같습니다.
    세상도 쉽게 변합니다 우리 인간의 가치관도 수시로 변해 갑니다

    인생이라고 하는 것 생각하면 할수록 그렇게 허무할 수가 없습니다.
    세상에 모두가 변하는 것이요, 없어지는 것인데
    여기에 소망을 두어거나 집착할 것 하나도 없습니다.
    마음 가볍게 비우고 살아야 합니다.

    인간이 달나라에 간다고 하며 고층빌딩을 짓고
    수 십억 원 짜리 좋은 집에 살고 고급 승용차를 탄다고 으시대지만
    인생은 풀과 같이 금방 시들고 마는 비천한 존재입니다.

    지난번에 세계 무역센터 110층 짜리 두 건물이 먼지를 날리며 허무하게 무너져 내리는 것을 보십시오.
    아무리 큰 고층빌딩도 성냥갑처럼 순식간에 넘어지고 수천명이 하루아침에 없어지는 것을 보면서 인생이 얼마나 허망한 것이 가를 깨닫게 됩니다

    의지할 가치가 없는 것을 의지하면 그것이 쓰러질 때 같이 쓰러지고 맙니다.
    자식도, 물질도, 친구도 하나님처럼 의지하지 말아야 합니다.

    천하를 호령하던 박정희 대통령도 무덤만 남아 있습니다.
    돈 많던 재벌 이병철씨도, 정주영씨도 천년 만년 살 것 같았지만,
    돈 한푼 못 가져간 채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변하지 않는 것도 있다고 합니다.
    25절을 봅시다.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오직 주의 말씀은 변하지 않고 세세토록 영원하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소망과 삶에 목표는 주의 말씀을 믿고 순종해야 합니다.

    시편 39편 6-7절에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같이 다니고 헛된 일에 분요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취할는지 알지 못하나이다 주여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라고 말씀했습니다.

    믿음과 소망의 근거를 하나님의 말씀에 두어야만 실망하지 않는 인생이 될 것입니다.
    세세토록 변함없는 주의 말씀에 삶의 소망과 목표를 두는 지혜로운 삶이 되어야 합니다.
    성경속에 하나님 말씀은 2000년이 지났지만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의지할 것은 변하지 않는 말씀을 믿고 순종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진리의 말씀이라는 통로를 통하여 우리에게 삶에 갈길을 인도하시고
    지혜를 주시고 깨달음을 주십니다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의 계시를 어떻게 하면 잘 믿고 순종하느냐
    바로 이것이 신앙인 것입니다.

    요한일서 2장 15절에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우리가 안개와 같은 세상 것을 너무 사랑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들어올 자리가 없고 영원한 천국을 놓쳐 버리기 쉬운 것입니다.

    그래서 마땅히 구원받아야 할 사람이 세상에 일에만 빠져 살면
    하나님은 실패와 고통과 절망을 당하게 해서라도
    슬픔의 눈물을 통해서라도 천국을 바라보게 하십니다.

    예수께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하셨습니다.

    요한복음 5장 24절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하셨습니다

    계란이 겉으로 보기에 똑같지만,
    생명의 씨가 없는 것은 무정란이요, 생명의 씨가 있는 유정란은 따로 있습니다.
    이 유정란 만이 부화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사람들도 겉으로 보기에는 똑같아 보여도 예수님을 믿고 영접한 사람만이 영생을 얻고 부활하여 천국에 들어갑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이 되려면 그 영혼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 없는 부유함은 파멸로 갑니다.
    하나님 없는 지식은 교만으로 갑니다.
    하나님 없는 문화는 타락으로 빠져 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믿음으로 구원받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구원을 협소하게 이해하고 구원을 천국 가는 것 정도로만 생각합니다.

    구원받은 것은 목표가 아니라 출발점입니다.
    믿음은 정지된 인격으로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서서히 자라나야 하는 것입니다.

    어린아이가 태어났으면 성장해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도 성장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 믿는다고 고난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오는 고난이 있는데 고난에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이 세상에 태어나서 행복하게 살아가기를 소원합니다.
    그러나 실상 인생에는 행복보다는 불행이 더 많고 기쁨과 즐거움보다는 슬픔과 고통 이 더 많이 찾아옵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은 사람들인데도 사업이 실패하고, 질병으로 고통을 당하고, 자녀들이 곁길로 나가고, 대학진학에 실패하고, 직장을 얻지 못하여 낙심에 빠지는 등 참으로 마음이 안타까울 때 가 많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어려움에 처한 형제들에게 모든 원인이 신앙생활을 잘못해서 그렇다고 뒤에서 수군거리면서 상처받은 가슴에 도리어 못을 박기도 합니다.

    어떤 목사님이 대장암에 걸려서 수술을 받고 의식이 깨어나고 있는데 병상을 찾은 교회 중직들이 말하기를 "목사님이 무얼 그렇게 잘못해서 저런 몹쓸 병을 얻었을까?" 하면서 혀를 차더라는 것입니다. 그 목사님은 생사를 헤매면서도 그 이야기를 듣고서는 마음이 너무 아파 견딜 수 없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꼭 죄를 지었을 때 고난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죄를 지은 사람이 당할 수도 있습니다. 죄는 인간을 불행하게 만들고 고통의 한가운데에 빠뜨립니다. 그러나 모든 고난이 일률적으로 죄 때문에 찾아온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고난을 어떻게 이해하며 어떠한 자세로 맞이해야 할까요?
    무엇보다도 우리는 고난을 당할 때 그것이 우연히 아무 의미도 없이 온 것이 아니라 거기에는 무언가 뜻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1)하나님의 메시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어느 부모가 이유없이 자녀에게 매를 대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부모가 자녀에게 매를 대는 것은 자녀를 사랑함이요 더 잘되기를 바람으로 징계의 매를 대는 것입니다.

    물론 자신의 죄의 잘못으로 고난을 자초한 경우라면
    하나님 앞에서 죄를 회개하고 사죄의 은총을 간구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 고난을 당하게 되었다면 거기에는 하나님의 깊고 선하신 뜻이 담겨져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런 경우에는 고난이 꼭 그 사람에게 괴로움을 주는 것만은 아닙니다.
    그 고난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큰 축복을 누리게 됩니다.

    예수의 제자들이 갈릴리 바다에서 배를 타고 건너편 마을로 가다가 큰 풍랑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바다에서 뼈가 굵었다던 그들이었지만 그런 돌풍은 난생 처음 경험하는 것이었습니다. 도저히 살 희망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생명의 위기를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모든 제자들이 절망하고 있는 그때 주님은 그 고난의 파도를 타고 바다 위를 걸어오시며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는 겁에 질려 있는 제자들에게 "내니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시며 바람과 바다를 잔잔케 하셨습니다.

    2) 이야기에서처럼 우리도 고난을 당하였을 때 주님을 만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평탄할 때보다 오히려 고난의 바다에서 도저히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용기조차 나지 않고 절망하는 바로 그때 주님을 만나게 되는 은총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후에는 그 고난이 오히려 하나님의 축복이었다고 고백을 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고난 속에는 하나님의 특별한 축복이 담겨져 있을 때가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무서운 고난의 파도 속에서도 좌절하고 절망하기보다는 고난 속에 담겨져 있는 하나님의 뜻과 섭리의 은총을 발견하고 더욱 굳건한 믿음으로 고난을 헤쳐나가고자 노력해야 합니다.

    3) 진실로, 그리스도인들이 당하는 고난은 믿음을 연단하는 유익함이 있습니다.
    사람이 고난을 당하지 않고 어려움을 겪어보지 않으면 대개가 마음이 자만심에 가득 차게 됩니다.
    신앙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에게 찾아온 고난으로 인하여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나아가게 되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 겸손히 순종하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시편에서는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시 119:71)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믿는 사람들에게 있어 고난은 꼭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므로 우리가 고난을 받을 때 하나님의 뜻을 깊이 생각하면서 믿음으로 어려움을 잘 이겨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고난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핍박을 당하여 어려움을 겪고 있는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세상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주인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분은 하나님 한 분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의를 위하여 고난을 당할 때 두려워할 것이 없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고난 당하는 자에게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의 관심은 이 세상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보고 어떻게 취급하는가 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바라보시는가에 있어야 합니다.

    다른 것은 전혀 문제삼을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고 하나님이 우리를 도와주시면 우리는 결국 승리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이 세상에서 아무 것도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주님은 하늘과 땅의 주인이시요 영원한 나라를 상속해 주실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이 분을 위해서 사는 것이야말로 가장 영광스러운 축복입니다.

    우리가 어떠한 고난을 당하게 된다 할지라도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한 일이라면 기쁨으로 나설 수 있는 그리스도의 일꾼들이 다 되어야겠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편지를 받는 수신자들에게
    버려야 할 것과 사모해야 할 것이 있음을 1절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먼저 버려야 할 것은
    "모든 악독과 모든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이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영혼이 악독과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남을 비방하는 말로 가득채우면
    우리는 영적으로 성숙할 수 없는 것입니다.

    1절에 '악독'이란 말이 나오는 데
    첫 번째로 나오는 '악독'은 다음에 나올 네 가지 죄를 포괄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첫번째'궤휼'은 무엇입니까?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남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속임수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한 마디로 속임수가 판을 치는 세상입니다.
    내막을 알고 보면 마음놓고 먹을 것이 없을 정도로 사회전체가 온통 속임수로 난무합니다

    두 번째 '외식'이란 말은 '마스크'에서 유래된 말입니다.
    연극 배우들이 가면을 쓰고 연극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얼마나 자주 가면을 쓰고 살지 않습니까?
    예수님 당시에도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외식하는 자들로서 우리 주님께 책망을 받았습니다.
    우리 가운데 있는 '외식'을 버리지 않는 한 우리는 건강하게 자랄 수가 없습니다.

    세번째 '시기'란 남이 잘되는 것을 그냥 못 봐주는 성품입니다.
    우리 주위의 사람이 성공하면 꼭 그 성공에 대해 걸고넘어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좋지 못한 소문을 퍼트린다든지, 상대방을 헐뜯는 경우가 있습니다.

    네번째 '비방하는 말'도 버리라고 합니다.
    비방이란 앞에서 정정당당하게 얘기하지 못하고 항상 뒤돌아 서서 수군거리는 테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깎아 내릴 목적으로 뒤에서 욕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없는 곳에서 그 사람에 대한 험담을 늘어놓지 마십시오.

    건설적인 비판을 하려면 그를 향해 진심으로 사랑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누군가에게 사랑어린 충고를 하려면 일주일 정도 기도합니다.
    진심으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일주일동안 기도하고 사랑어린 비판을 하는 사람과
    순간적인 충동으로 비난하는 사람과는 말하는 태도부터 다릅니다.
    근거가 있어도 비방하는 말은 삼가십시오.
    그것은 우리의 신앙이 자라는 것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2절에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2장 2절)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는 것이 무슨 말입니까?
    베드로 사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전하고 영적인 젖이라고 표현합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과연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갈망하고 있습니까?
    사슴이 숨을 헐떡이면서 시냇물을 찾듯이 하나님의 말씀을 갈망하여야 합니다.

    3절은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

    식당에 가서 음식을 먹었는데 너무 맛있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다음 번에 귀한 손님을 모시고 다시 갑니다.
    혹은 사랑하는 가족들을 데리고 찾아갑니다. 왜 그 곳에 다시 갑니까?
    전에 맛보았기 때문입니다. 그 맛을 알기 때문에 다시 찾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자비로움을 경험합니다.
    우리는 주님을 자주 배반하고 그 분의 마음을 아프게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분은 자신의 자비로움과 인자하심을 내게 베풀어주십니다.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고 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기억상실증에 걸린 사람 마냥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모르고 살아갑니다.
    이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입니다.

    학생이 자신의 신분을 제대로 인식하지 않게 될 때 청소년 범죄가 생겨나게 됩니다.
    부모가 자신의 신분을 잊어버리게 될 때 그 가정에 위기가 찾아오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으로써의 신분을 잊어버리고 있다면 불행한 일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그리스도인의 신분에 관해
    첫 번째 그리스도인을 가리켜 '신령한 집으로 세워져 가는 산 돌'이라고 말합니다.(5절)
    우리는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살아있는 귀한 돌들입니다.

    4절에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께 나아와" 예수 그리스도는 보배로운 산돌이십니다.
    살아 있는 돌! 영어로 리빙스톤!(선교사 리빙스톤이 아닙니다.)

    산돌이라는 표현은 아주 독특한 표현으로 생명의 견고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부활생명의 견고성입니다.

    5절을 봅시다. "너희도 산돌 같이"라고 말씀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우리도 산돌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산돌이요, 우리도 산돌이라는 것입니다.

    산돌이란 예수님의 부활생명의 견고성과 영원성을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건물은 언제나 기초가 중요합니다.
    기초가 튼튼하지 않은 집은 바람이 불고 창수가 나면 금방 무너집니다

    우리는 우리의 영원한 반석이시며 기초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위에 신령한 집을 건축하는 건축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벽돌은 한 장 그 자체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여러 개의 벽돌이 서로 맞물려 쌓일 때 훌륭한 건물도 되고 성벽도 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혼자 잘났다고 떠들어도 절대로 혼자서는 하나님의 교회가 될 수 없습니다.
    살아 있는 돌들이 모여서 각각 자기의 맡은 사명을 다할 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신령한 집이 되는 것입니다.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서로 부부가 한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신자들은 주님의 건물에서 살아있는 돌들입니다.
    그리스도의 산돌을 의지할 때 단단한 건축물을 세워갑니다

    삼풍 백화점의 부실공사가 남긴 끔찍한 사고의 현장을 보면서도
    사람들은 지금도 되도록이면 건물을 빨리 집을 지으려고 합니다.
    완공날짜를 미리 잡아두고 그 날짜에 맞추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의 신령한집은 완공날짜가 없습니다.
    평생 지어져 가는 것입니다.

    베드로도 평생을 두고 신령한 집으로 지어져 갔던 인물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제자로 부름을 받을 당시만해도 난폭하고,급한 성격의 소유자였습니다.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성격이었지만 자신에게 불이익이 돌아올 것 같으면 피해버리는 비겁자였습니다.

    그런 그가 평생토록 신령한 집으로 지어져 갔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죽음을 얼마남겨두지 않은 때, 다른 그리스도인들에게
    "너희도 산 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져 가라"고 말합니다.

    둘째로 우리의 신분은 거룩한 제사장입니다.(5절 下)
    산돌로 세워진 신령한 가정의 성전에는 제사장이 있어야 합니다.
    누가 제사장입니까? 구약에는 택한 레위족속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9절을 보십시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제사장입니다.

    개신교에서는 누구나 제사장으로 하나님께 홀로 나아갈 수가 있습니다.
    과거 구약시대 때 제사장들이 했던 일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중보자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서는 제사장을 통하지 않고는 불가능했습니다.

    그런데 제사장 없이도 우리가 하나님께 개인적으로 나아갈 수 있게 만드신 분이 누구십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 분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성전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졌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사람사이에 막혔던 담이 무너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도 제사장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으로 하여금 제사장이 될 수 있게 하셨습니다.
    이제부터 그 제사장의 신분으로 하나님께 나아오기를 기대하고 계십니다.

    언제든지 여러분의 마음을 열어놓고 그분께 나아가기만 한다면 언제든지 그 분은 여러분을 만나주실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더구나 우리는 9절에서 '왕같은 제사장'이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왕같은 권세와 권위와 능력을 함께 갖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몸을 드려라
    그런데 구약시대 제사장은 소나 양을 잡아 피를 제단에 뿌리고, 백성들의 죄사함을 위한 기도를 올렸습니다.
    그렇다면 신약시대의 제사장인 우리는 무었을 제물로 드려야 하는가?

    로마서 12장 1절에 보면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고 했습니다.
    신약시대 제사장의 의무는 자신의 몸을 하나님께 산 제사로 드리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대개 특권만 생각하고 책임은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제사장되게 하신 것은 다른 사람들이 누릴 수 없는 큰 특권입니다. 하지만 우리들에게 특권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책임도 함께 주어졌습니다.
    책임이란 우리의 몸을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산 제사로 드리시길 바랍니다.
    지난 한 주간 세상에 살았던 우리의 몸을 주일날 주님 앞에 제물로 드리는 것입니다.

    죄와 허물로 더럽혀진 몸이 아니라 경건과 신령함으로 주님 앞에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신분의 소유자들입니까?
    신령한 집으로 지어져가야할 산 돌들입니다.
    우리는 거룩한 왕같은 제사장들입니다.
    뿐만아니라 거룩한 나라의 백성들입니다.

    이제 한주간 세상을 살면서 고난이 오고 슬픔이 있어도
    왕같은 제사장의 신분으로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음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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