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엡4:1-6)
우리 행복한 교회도 그동안 정들었던 4단지를 재개발로 인하여 떠나야 합니다.
또한 오늘 행복한 교회를 마지막으로 떠나는 집사님들도 있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헤어지는 집사님들을 생각하며 오늘 말씀을 택했습니다.
특별히 여러분 어디를 가든지 오늘 본문 2-3절에 다섯가지 덕목을 마음에 담고 늘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오늘 말씀에 제목은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라는 말씀입니다.
교회란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입니다.
하나님은 필요할 때 필요한 사람들을 부르셨습니다.
갈대아 우르에서 살고 있던 아브라함을 부르셨고, 미디안 광야에서 양을 치는 모세를 부르셨고,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를 잡는 어부 베드로를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다메섹 도상에서 바울을 부르셨습니다.
이렇게 부르심을 받은 그들은 부르심을 입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행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도 왜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셨는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택하여 부르시고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생(生)은 곧 명(命)령이므로 생명이라고 부른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은 내 마음대로 살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라고 생명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왜 우리를 부르셨습니까 ?
사랑하기 때문에 부르셨고 필요하기 때문에 부르셨습니다.
구원하시기 위해서 부르셨고 일하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성도들은 부르심에 감격하며 주님의 뜻대로 행하며 살고자 하는 열심과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일찍 부르셨고 어떤 사람은 늦게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언제 부르심을 받았느냐 하는 시기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셨을 때에 나름대로 부르심에 이유가 있음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확실한 소명을 깨닫고 인생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부름을 받은 우리는 소속이 달라지고, 신분이 달라지고, 운명이 바뀌었습니다.
그러므로 부름을 받은 사람은 이전에 살던 세상 사람들과는 다르게 살아야 합니다.
1절 말씀을 보면
"그러므로 주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첫째, 하나님은 우리에게 부르심에 합당한 삶은 요구하십니다.
성도 여러분!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기 위해서 때로 힘들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힘들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부르신 하나님을 끝까지 믿는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즉 부르심을 받은 우리는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기 위해서 끝까지 믿음의 길을 가겠다는 결단과 각오가 있어야 합니다.
미국에 어느 목사님이 시골에 있는 어떤 교회를 맡아서 돌보고 계셨습니다.
하루는 어떤 남자성도로부터 급히 와달라는 전갈이었습니다.
목사님은 부랴부랴 뛰어갔더니 참으로 비참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이 남성분이 자기의 두 어린 자녀를 데리고 강에 낚시를 갔는데 아버지가 낚시를 하는 동안에 어린 두 자녀가 물놀이를 하다가 물에 빠져 죽고 만 것입니다.
두 어린 아이의 시체를 가지고 집으로 왔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 사이에 집에서는 큰 불이 나고 말았으며 혼자 집을 지키고 있던 그의 아내는 불길에 그만 죽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불에 타 죽은 아내의 시신과 물에 빠져 죽은 두 아이의 시체를 앞에 놓고서 그는 몰라 오열하면서 통곡하고 있었습니다.
목사님은 그 끔찍한 광경을 보고서 할 말을 잃어버리고 한 동안 멍하니 있다가 정신을 차리고서 그 성도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형제여, 이제 형제는 두 가지 가운데 한 가지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이 냉혹한 현실 앞에서 하나님을 원망하면서 신앙을 저버리고 교회를 떠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또 한가지 길이 있는데 이 비참한 사건을 보면서
형제는 인간의 연약함을 깨닫고 오히려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께 더욱 메달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 두 가지 가운데서 형제는 무엇을 택하시겠습니까?"
그 남자는 한참동안 생각하더니 입을 열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 저는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께 메달리겠습니다."
여러분! 우리들의 삶속에도 여러 가지 어려움이 닥칠 때도 있습니다
이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일편단심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는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런 예수님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하나님이 부르신 길은 결코 쉬운 길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기 위해서 때로는 힘들 때도 있고 어려울 때도 속상할 때도 있으며 마음에 상처를 받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앞에 어떠한 어려움이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겠다는 각오와 결심이 약해져서는 안될 것입니다.
2~3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둘째로, 부르심에 합당한 삶에 다섯 가지 덕목이 있습니다.
첫째는 겸손입니다. 둘째는 온유입니다. 셋째는 오래 참음입니다. 넷째는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는 것입니다. 다섯째는 하나되는 것입니다.
첫째, "모든 겸손과"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을 소개할 때에
자신을 만삭되지 못하여 난자(고전15:8) 같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말로 하면 나는 팔푼이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것입니다.
또한 죄인 중의 괴수(딤전1:15)라고 하였으며 자신은 모든 사도들 중에 가장 작은 자(고전15:9)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항상 겸손해야 합니다. 아랫사람에게 조차도 겸손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믿는 사람은 그 모습 자체가 겸손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기뻐하십니다.
언제나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시고, 겸손한 자를 축복하십니다.
겸손이란 무엇인가?
자신의 무능을 연약함과 부족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달아 알 때 가능해집니다.
하나님의 무한한 은혜와 영광을 깨달을 때에 우러나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삶은 그 자체가 겸손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근본이 하나님이지만 자신의 모습을 낮추시고 종의 형체를 가지셨습니다.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바로 우리를 살리시기 위하여 자신을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런 예수님의 겸손하심을 본받아야 합니다.
겸손은 모든 축복의 근원이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복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넘어짐의 앞잡이다" 라고 말씁하십니다
겸손에 반대인 교만은 파멸을 낳습니다.
겸손은 은혜받는 길이요(벧전5:6), 지혜를 얻는 길이요(잠11:2),
교회를 하나되게 하는 길입니다(약4:1)
둘째, "온유로 하고"입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온유하심을 본받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부르심을 입은 우리들도 온유함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민수기 12장 3절에 보면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라고 했습니다.
모세가 애굽의 바로왕을 이기고 모든 역경을 극복한 위대한 지도자가 된 것은 모세의 온유함 때문이었습니다.
온유란 따듯하고 부드러움입니다.
온유하다고 해서 무능한 것이 아니라 부드러우면서도 힘과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영어로 온유를 "Power under control"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부드러움으로 악을 이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외유내강'이란 말을 씁니다.
우리의 겉 모습은 따뜻하고 부드러워야 합니다
그러나 신앙문제만은 도저히 양보하지 않는 강한 모습이 보여져야 합니다.
그래서 자녀들이 "우리 엄마는 부드러운 분이셔 그러나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나 예배에는 엄격하신 분이야" 라는 평을 받아야지
온유하다고 해서 한없이 양보하고 의로운 진리앞에서 뒤로 빼는 모습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적으로는 강하나 외적으로, 사람들에게는 유하라는 말입니다.
하루는 갈대와 감람나무가 서로 힘 자랑을 했답니다.
마침 거센 폭풍이 불기 시작하자 갈대는 이리 굽히고 저리 쏠리면서도 어렵지 않게 돌풍을 잘 이겨냈습니다.
그러나 강하다고 자랑하며 뻣뻣이 버티던 감람나무는 그만 뚝 부러지고 말았습니다.
최후의 승자는 뻣뻣한 사람이 이기는 것이 아니라 온유한 사람이 승리하는 것입니다.
온유한 사람은 대인 관계에서 친절하고 예의 바르고 성내지 않고 자기주장 자기고집을 세우지 않는 사람입니다.
부당한 대우에도 불평치 않으며 설령 자기의 의견이 관찰되지 않았다고 분을 품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불의에 대해선 엄격하고 진리에 대해서는 용감한 사랍입니다.
온유한 사람은 어떠한 고난 앞에서도 그것을 수용하며 감사와 기쁨을 잃지 않는 부드러운 마음입니다
셋째, "오래 참음으로"입니다.
예수님은 열악한 환경과 어려운 처지를 다 참으셨습니다.
사람들에게 배척을 당하시고 멸시를 당하셨지만 끝까지 오래 참으셨습니다.
사람들은 보통 한두 번은 잘 참습니다.
그러나 계속 괴롭히면 "에이 참는 것도 한도가 있지" 라고 화를 버럭냅니다
그러나 그때 지금까지 참았던 수고가 헛일이 되고 일을 그르치게 됩니다.
우리는 “에이 참는 것도 한도가 있지”가 아니라
“에이 참는 것은 한도가 없어” 라고 되새기며 참으면
결국 <열번 찍어 안넘어가는 나무 없다>는 말처럼 목적을 이루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에 승리는 오래 참음에 있습니다.
언제까지 참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강림하실 때까지 참아야 합니다.
히브리서 12장 1절에서는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라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 7절에서는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서로 참아주고 서로 기다려 주는 인내가 있는 곳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며 선한 역사가 이루어집니다.
공동체 속에서 성도의 교제에 참으로 필요한 미덕이 오래 참으려 기다려주는 것입니다. 오래 참음이 없이는 공동체가 바로 지탱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려면 힘들고 어려울 때가 있을 지라도 오래 오래 참으시기 바랍니다.
속이 상할 때도 있고 화가 날 때가 있어도 십자가 상에서 끝까지 참으신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오래 참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넷째,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입니다.
예수님은 항상 용서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을 때에 악을 악으로 갚으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을 위해서 오히려 기도해 주었습니다.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저들은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하나이다."
농사를 해치는 여우를 농부가 덫을 놓아서 사로잡았습니다.
그리고 앙갚음을 한답시고 기름먹인 끈을 여우 꼬리에다 매고 거기에다 불을 붙였습니다. 그랬더니 그 여우가 뜨거워서 이리 뛰고 저리 뛰다가 수학을 앞둔 밀밭으로 뛰어들어갔습니다.
결국 이 농부는 한 해 농사를 모두 망치고 말았다고 합니다.
용납치 못하고 복수하는 것은 결국 더 큰 피해와 아픔과 비극을 가져온다는 교훈입니다.
"용납하고"이라는 말의 헬라어 원뜻은 담요를 던져준다는 말입니다.
즉 담요로 상대방의 허물을 덮어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동기가 마지못해서 하는 것이 아니고 사랑 가운데서 덮어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을 덮어주셨습니다.
예수께서는 형제를 용서를 몇번까지 용서하라고 하였습니까?
일곱 번씩 일흔번이라도 할지니라 하셨습니다.
교회를 이루는 것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모두 과거 죄인들이었습니다.
영원히 멸망받을 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寶血)로 죄 용서함 받고 새 사람들로 부름받은 존재들입니다.
그러기에 옛사람의 습관과 허물이 가끔 가끔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교제속에는 서로 교우간에 상대방의 실수를 용납함이 있어야 합니다.
잘못이 생겼을 때에 서로 바로 잡아주고 용서해 주어야 합니다.
세상에 허물과 실수가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가 예배 때마다 외우는 주기도문 중에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한 것같이' 라고 기도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내가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이 없나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사랑은 주는 것입니다. 손익과 자격을 따지지 않고 주는 것입니다.
부르심을 입은 우리들이 할 수 있는 길은 사랑으로 서로 용서하는 것입니다.
한번 덮어준 담요를 자꾸 걷어차도 끝까지 사랑의 담요로서 따뜻하게 덮어 주는 것입니다.
더구나 세상은 마치 추운 계절과 같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받은 은혜에 감사해서 주변 의 모든 사람을 따뜻하게 감싸주는 것입니다.
다섯째, 3절 말씀대로 “하나되는 것입니다”
3절에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들에게 가장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일까.
온 가족이 모두가 한 마음과 한 뜻을 품는 것입니다.
정신병원에 가면 수많은 환자들이 있는데 그 많은 환자들에 비해 관리하는 사람은 극히 적어서 100명의 환자가 있다면 3명 정도면 능히 관리한답니다.
그 이유는 정신병자들은 하나되는 일을 못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나는 나풀레옹이다“ 하고 소리치면
한쪽에서 ”이놈아 내가 언제 네게 왕권을 주었느냐 나는 하나님이다”라고 한답니다.
환자들이 하나되지 못하기 때문에 절대로 힘을 합쳐서 정신병원에서 뛰쳐 나올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변에도 하나되지 못하고 자기만 생각만 주장하고 자기만을 챙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시편 133편에 보면
[형제가 연합하여 아름다운고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 옷깃까지 내림 같고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이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하나님께서는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하는 그곳에 축복을 명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되는 자리에 큰 축복을 베푸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각자의 개성과 습관도 생각하는 것이나 삶의 스타일도 다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가 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안됩니다. 그러나 하나가 되면 어떤 일이든지 잘 됩니다.
고전12:13을 보면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성령께서는 우리 모두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되게 하셨습니다.
이것을 우리가 힘써 지켜야 합니다.
그런데 악한 사단 마귀는 우리의 하나됨을 방해하고 깨뜨리려고 하고 서로 등을 지게 합니다.
마귀가 역사하는 것입니다.
마귀는 우리의 모임을 깨뜨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를 하나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열심을 가지고 힘써 지켜야 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되려면 묶을 때 허리띠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3절에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되려면 평안해야 합니다. 분란이 일어나면 안됩니다.
나와 너 사이가 평안할 때 문제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서로간에 평안하지 못하고 불화할 때 하나됨에 금이 가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음악을 내는 오케스트라는
연주자도 다르고, 악기도 다르고 , 소리도 다르고 움직이는 것도 모두 다릅니다.
그러나 모든 연주자와 악기들이 지휘자를 중심으로 한데 어울리면서 너무나 웅장하고 아름다운 음악을 만들어 냅니다.
우리 모두가 그렇습니다. 신앙의 경주라고 해서 혼자 잘난 체하면 모든 조화와 평화가 깨어집니다. 신앙의 경주는 평화롭게 하나됨이 필요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나가 될 수 있습니까?
오늘 2-3절에 부르심에 합당한 다섯 가지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거꾸로 성령아래 하나가 되려면
첫 번째 겸손해야 합니다 두 번째 온유해야 합니다.
세 번째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해야 합니다.
네 번째 어려움이 있어도 끝까지 오래 참을 줄 알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왜 우리가 하나되어야 하는지 그 이유를 4~5절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4~6절 말씀을 읽는다
교회는 가정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는 궁극적으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나라가 어려울 때마다 “뭉쳐야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고 했습니다.
교회든지 근본적으로 하나가 되어야 하며
하나된 교회는 그 모습이 거룩해야 합니다.
교회의 본질은 거룩함에 있습니다.
교회가 거룩함이 없으면 교회의 생명은 끝나게 됩니다.
교회가 거룩하다고 할 때
그 의미는 성도들의 삶의 모습이 거룩할 때 교회가 거룩해 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부름 받은 성도는 그의 삶을 거룩하게 하기 위한 끊임없는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 노력은 성령의 능력으로 이루어집니다.
교회가 거룩하려면 먼저 예배가 거룩해야 합니다.
거룩한 예배는 두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가 드려지는 예배가 거룩해야 하고
또한 우리들의 생활속에 삶이 거룩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우리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물은 삶으로 표현할 때 디아코니아(diakonia)라고 합니다. 즉 봉사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봉사의 하는 삶에는 의로움이 베여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우리 행복한 교회가 이제 4단지 재개발로 이사를 가야 하지만 저는 우리 교회에 대하여 무한 자부심과 희망을 갖습니다.
우리 교회의 자부심과 희망은 교회의 크기, 재정의 풍부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교회의 희망은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거룩한 삶을 사는 모습에서 저는 희망을 갖는 것입니다.
미국의 어느 마을에 큰 부자가 살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큰 파티를 배설하고서 주변에 있는 모든 이웃들을 초청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낸 뒤에 마지막으로 수영대회를 열기로 했습니다. 그 집에는 호수처럼 엄청나게 큰 수영장이 있었습니다. 집주인은 손님들에게 말했습니다.
"누구든지 수영장의 이 끝에서부터 저 끝까지 1등으로 헤엄쳐 온 사람에게는 큰 상을 주겠습니다. 세 가지 가운데 한 가지를 택할 수 있습니다. 첫번째는 나의 상속자인 무남독녀 외동딸을 아내로 맞이할 수 있는 특권을 주겠습니다. 두번째는 내 재산의 절반을 줄 수도 있습니다. 세번째는 내가 가지고 있는 세계에서 가장 값진 보석인 다이아몬드 반지를 주겠습니다. 참고로 이것을 팔기만 하면 전 가족이 3대째 아무 일을 하지 않고도 먹고 살 수 있는 엄청나게 귀한 보석입니다."
그곳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그 말을 듣고 금방이라도 뛰어들 것처럼 자세를 취했습니다. 그 때였습니다. 집주인은 사람들에게 이런 위협적인 말을 했습니다.
"지금 이 수영장 안에는 열흘 동안 굶긴 악어 50마리가 들어있습니다. 또 물리기만 하면 그 자리에서 3분내로 죽을 독뱀 100마리를 풀어놓았습니다. 거기다 이 속에는 독고기도 300마리나 들어있습니다. 피 냄새만 맡으면 공격합니다. 아마 5분을 넘기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그 소리를 들은 사람들은 수영장에서 한 걸음씩 물러났습니다. 아무도 감히 뛰어들 용기를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딱 한 사람이 용맹스럽게 뛰어들었습니다. 모두가 그의 용기를 보면서 박수갈채를 보냈습니다. 그는 필사적인 각오로 수영해서 무사히 도달했습니다. 그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 나왔습니다. 집주인은 약속한 대로 그에게 상을 주기 위해서 세 가지 가운데 한 가지를 고르라고 했습니다.
"내 딸과 결혼하겠습니까? 아니면 내 재산의 절반을 드릴까요? 그렇지 않으면 값진 다이아몬드 반지를 드릴까요?"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누가 내 등뒤에서 나를 밀었는지 나는 그것부터 알고 싶습니다."
누가 등뒤에서 우리를 밀어서 오늘까지 행복한 교회에서 아름다운 신앙의 길을 걸어왔습니까?
뒤를 돌아보니 그 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셨습니다.
뒤를 돌아보니 그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은 만유 위에 계셔서 지금도 우리를 보살펴 주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주관하시고 우리를 다스리고 계십니다.
지금도 우리와 같이 하시고 우리의 걸음을 인도해 주십니다.
이제 여러분 중에 멀리 이사를 가서 새로운 신앙생활을 시작하시는 여러분
어디를 가시든지 새로운 교회에 정착하여 신앙생활을 할 때에
언제나 겸손하시고 온유하십시요.
십자가에서 나를 위해 고난 당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생각하면서 우리도 오래 참으시고
혹시 미운 삶이 있어도 사랑으로 용납하시고 늘 평안의 매는 줄로 하나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끝으로 새로운 교회를 찾을 때에 이상적인 교회를 찾기 위해 방황하지 마십시요.
우리가 찾고 있는 이상적인 교회를 발견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며 아마 평생 그러한 교회를 만나지 못할 지도 모릅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먼전 좋은 교인 이상적인 교인이 되어야 좋은 교회 이상적인 교회를 만나는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 행복한 교회를 떠나는 여러분
어디에 가시든지 오늘 다섯가지 부름에 합당한 삶을 사심으로
하나님의 축복이 늘 차고 넘치기를 주님에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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