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을 진짜 영접한 사람 2002-09-23 16:43:32 2002년 09월 22일 // 누가복음 7: 36-50 주님을 진짜 영접한 사람(눅7:36-50)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 시몬의 집에, 식사 초대를 받으셨다(36). 바리새인 시몬은, 예수님을 끈질기게 초청하여, 자기의 집으로 모셨다. 그 당시에는 유명한 외부인을 초청하면, 동네 사람들은 연회장 주변에 모여, 초청손님과 대화할 수 있었다. 또한 손님을 초청하였을 때에는, 손님을 다음과 같이 접대하는 관습이 있었다. ① 손님이 도착하면 그 집 하인은, 깨끗하고 시원한 물 항아리를 가지고, 손님의 발을 씻어 주었다. ② 손님이 식탁에 앉으면, 하인은 손님의 머리 위에, 약간의 장미 기름을 뿌렸다. ③ 랍비가 방문했을 때는, 주인이 직접 나가서, 랍비에게 입맞추었다. 그런데 본문의 시몬은, 예수님을 초대하고도 영접하지 못한, 너무나 안타까운 사람이다. 저는 성경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이, '가룟 유다'라고 생각한다. 예수님의 말씀을 3년 반이나 들었으면서도,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지도 못했고, 영접도 못했다. 예수님을 열심히 좇아 다녔지만, 결국에는 예수님을 배신하고, 결국 지옥에 떨어진 사람이다. 그러므로 교회를 오래 다닌 경력이, 우리의 구원을 보장하지 못함을 알 수 있다. 바리새인들은 종교생활을 열심히 했지만, 구원받지 못했고, 서기관들은 성경지식이 많아도, 구원받지 못했다. 또한 사두개인들은 많이 베풀었지만, 그들도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다. 그래서 신앙은, 길이로 재서는 안 되고, 깊이로 재야 한다. 예수님을 영접해야 참 신앙이다.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전에는, 절대로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다. 요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했다. 영접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 1. 본문은 무엇이 영접이며, '무엇인 진짜 영접인가?'를 보여준다. 오늘날에는 너무나도 가짜가 많다. 겉으로 보면 진짜 같지만, 속을 보면 아닌 경우가 많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마7:21)고 하셨다. (1) 영접이란? 자신의 잘못을 돌이키고, 주님을 나의 구세주와 주님으로 받아들임을 '영접'이라고 한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하면,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말씀을 주신다. 설교자를 통하여, 성경을 통하여, 주변사람들을 통하여 말씀을 주신다. 영접한 사람은 말씀을 주실 때, 그대로 받아들여 믿음으로 살게 된다. 그래서 영접 = 믿음이 된다. 예수님을 진실로 영접하면,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주님께로 돌아가 죄를 버리고, 이제는 주님 안에서 살고자 하는 마음으로, 마음과 행동을 바꾸게 된다. 그러나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을 때, 많은 사람들이 환영하고 영접했지만, 껍데기 뿐이었다. 진정으로 영접하지 못했다. 그 이유는 어둠을 더 사랑했기 때문이다(요1:5). (2) 가짜 영접 바리새인 시몬은, 자신의 집으로 예수님을 초대하였다. 외적으로 보면 완벽하다. 그러나 그가 진정으로 예수님을 영접했나요? 예수님이 지적하시는 모습을 보십시오. "…내가 네 집에 들어오매,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44) "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45), "너는 내게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46)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자신에 대하여, 푸대접해서 불평하는 말씀이 아니다. 바리새인 시몬은, 예수님을 구세주로 알지 못했다. 그래서 예수님을 초청했지만, 마땅히 드려야 할 경배는 드리지 않고, 주님께 대한 예의를 다하지 못했다. 그는 예수님을, 괜찮은 사람으로 인식했기 때문에, 외적으로만 모셨다. 예수님께 대한 사랑과 존경과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이처럼 무례한 행동을 하였다. (3) 진짜 영접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의 초청을 받아, 집에 계실 때, 그 동네에 죄인인 한 여자가,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계시다는 소문을 듣고 왔다. 이 여자는 이름이 나타나지 않고, 성경에는 다만 '죄인'이라고 말씀한다. '죄인'이라는 말은 '창녀'에 대한 유대인들의 통속적인 표현이기에, 아마 창녀였을 것이다. 만일 창녀였다면, 경건한 바리새인의 집에, 함부로 들어올 수 없었다. 죄 많은 여인이었지만, 그녀는 예수님을 진짜 영접했음을 알 수 있다.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씻었으며"(44) "…저는 내가 들어올 때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45) "…저는 내 발에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46) 더 구체적으로 38절을 중심으로 보자. ① 예수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은총을 바라봄) 그녀는 감히 주님 앞에, 마주 설 수 없는 죄인이므로, 용기가 없었다. 오직 은총만 바라보았다.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의 고백은 한결같이 "나는 부정한 사람이기에, 망하게 되었다" 고백한다. ②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회개) 진정한 회개는, 죄인 된 자신을 보고, 비통한 눈물을 동반한다. 자신의 죄에 대하여 심각하게 생각하고 뉘우치지 않는다면, 성서적 회개가 아니다. 죄지은 자신을 진정 마음 아파한다면, 눈물 흘리지 않을 수 없고, 또한 사죄의 확신이 찾아올 때, 복받치는 감사의 눈물이 된다. 그래서 약4:9에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라고 했다. 여인은 '나 같은 죄인을, 용서하시고 받아주시는 예수님께' 너무도 감사하여 눈물을 흘렸다. 눈물은 망나니 자식을 돌아오게 하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거두게 하기에, 부끄러워해서는 안 된다. ③ 자기 머리털로 씻고(사랑) 여인의 긴 머리털은, 여인의 영광을 말한다(고전11:15). 또한 주님께 헌신(나실인)을 뜻이다(삿16:17). 자신의 영광을 버리고 주님을 위해 살겠다는 표시로, 자신의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씻었다. 지금도 유대여자는, 자신의 영광을 버리고, 남편만을 위해 살겠다는 표시로, 머리털을 밀어버리고, 수건을 두른다. 이렇게 그녀는, 오직 주님만 위하여 살겠다는 결단을 머리털로 주님의 발을 감쌌다. ④ 발에 입을 맞추고(경배) 발에 입을 맞추는 행동은, 깊은 존경의 표시다. 특별히 지도자인 랍비에게 드리는 행동이었다.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은, 주님을 높이게 된다. ⑤ 향유를 부으니(헌신) 이 여인은 동네 사람들로부터 '죄인'으로 불리던 '윤락여성'이었다. 그녀의 입술은, 뭇 남성을 죽음을 인도하였고, 머리털은, 뭇 사람을 유혹하는 정욕의 도구였다. 또한 그 향유는, 뭇 남성을 유혹하고자, 몸에 바르던 죄악의 수단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을 자신의 주님으로 받아들이자, 이제 거룩하신 주님을 아낌없이 쓰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의 생각이 변하고, 행동이 변하고, 삶이 변했다. 더 이상 죄악의 병기가 아니라, 의의 병기로 드려지기를 원했다(롬6:19). 향유 냄새가 가득하려면, 옥합이 깨져야 향기가 진동한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주변에는, 향유냄새가 너무 나지 않는다. 신문을 봐도 그렇고, 소식을 들어도 그렇고, 악취가 너무 많이 난다. 좋은 냄새를 맡을 수 없다. 사회가 어두워져 간다. 예수님을 믿어도, 향유를 붓지 못하기 때문이다. 향유를 부으려면, 육신의 욕심이 죽어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로 육신의 욕심이 박살나야 한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 은혜를 받은 자가 적기 때문이다. 은혜 받고, 악취 가득한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는 성도가 되자. 내가 은혜를 받아야, 가정이 살고, 교회가 살고, 이 사회가 살고, 나라가 산다. 2. 예수님을 영접하려면, 죄인 됨을 깨달아야 한다. 신앙은 하나님과 나와의 만남이다. 하나님과 나와의 만남은, 구세주와 죄인과의 만남이다. 내가 죄인인줄 알고, 부족한 줄 알 때에, 주님과 만날 수 있다. 주님의 눈으로 나를 보지 않고, 세상의 눈으로 자신과 남을 보았기 때문이다. 이 세상은 하늘의 법이 없어도 살수 있지만, 하늘에서 살려면, 반드시 하늘 나라의 법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보실 때, 어떻다고 말씀하시나?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3:10)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3:23) 하나님께서 불꽃같은 눈으로 보실 때, 우리 모든 인간은 죄인이고, "죄의 삯은 사망이다"(롬6:23). 내가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 때, 주님께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 수 있다. 그녀는 자기가 누구인지 알았다. 자신은 죄인이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았다. (1) 자신의 죄를 깨달은 여인은, 예수님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존재요, 희망이었기에 놓칠 수 없었다. 살아서는 사람 대접을 받을 수 없고, 죽어서는 지옥의 심판을 면할 수 없는 여인이었기에, 죄인들을 용서하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바라볼 때, 영접할 수밖에 없었다. 예수님을 진심으로 영접하여, 그녀는 용서받았다. 48절에, 예수님은 여자에게 "네 죄사함을 얻었느니라"고 하셨다. 그녀는 이미 죄 사함을 얻었는데, 또 다시 확증하고 계시는 말씀이다(완료형 수동태). 자신은 사랑 받을 수 없는 여인이었는데, 주님의 사랑을 받았으니, 너무나 감사하고 감격했다. 나 같은 죄인이 용서함을 받았다는 구원의 감격이, 그녀에게 삶의 기쁨으로 넘쳐났다. 어느 목사님께서, 경북 영덕 청년연합 찬양집회를 인도하셨는데, 참 이상한 광경을 목격했다. 모두들 뜨거운 가슴으로 손뼉을 치며 찬양하고 있는 그 시간, 한 청년이 입으로는 열심히 찬송을 하는데, 한 손으로는 자기의 뺨을 계속 때렸다. 찬양하던 사람들은, '혹시 정신이 이상한 사람은 아닐까? 무슨 이유로 저렇게 자신을 학대할까?' 계속해서 마음에 걸렸다. 그는 조용한 찬송을 부를 때는, 너무나 행복한 표정으로, 지긋이 눈을 감고 노래를 하다가도, 빠른 곡의 찬송을 부를 땐, 영락없이 자신의 한쪽 뺨을 쳤다. 집회가 끝나고, 모두 일어섰다. 자기의 뺨을 치던 청년도, 다른 이들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를 무심코 바라본 찬양 인도자들은, 너무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는 한쪽 손을 못쓰는 사람이었다. 그는 다른 이들처럼 손뼉을 칠 수 없어, 성한 한쪽 손으로 자기의 뺨을 치면서라도, 주님을 찬양하길 원했던 젊은이였다. 그를 보고, 자신은 두 손이 멀쩡한데, 그렇게 하지 못해서, 너무나 부끄러웠다고 한다. (2) 바리새인 시몬은 자신이 의인이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상대적으로 필요한 사람이었다. '바리새인'이라는 말은 '다른 사람들과는 구분되었다( )'는 히브리어에서 왔다. 자신은 특별히 신앙생활을 잘하는 사람, '철저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라는 말이다. 바리새인들은 이처럼 '엘리트 신앙 의식'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었다. 바리새인같이 "내가 무슨 죄인이냐? 뭐가 부족하냐? 이만하면 됐지"하는 사람은, 아무리 교회에 나와도 은혜를 받을 수 없다. 의인의식을 가진 시몬은, 주님을 초대했지만, 삶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분 메시아가 아니라, 상대적으로 필요한 분, 랍비로 생각했기에, 선생님(40)으로 불렀다. 자신은 율법을 철저히 지킴으로, 구원을 얻게 되기에, 예수님이 없이도 얼마든지 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혈통'으로, 율법을 준수하는 인간의 노력과 같은 '육정'으로나, 종교적인 제사를 열심히 드리는 '사람의 뜻'으로 이루어지는 것으로 알고 있었기에, 예수님께서 구원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존재가 아니라, 단지 상대적으로 필요한 랍비일 뿐이었다. 이러한 눈으로 예수님을 볼 때, 우리는 더러운 죄인을 가까이하지 않고, 그들의 접근도 금하는데, 자신이 알고있는 죄인 된 여인을 멀리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그녀의 행동을 지켜보시는, 예수님을 보고 비웃었다. 그래서 39절에 "…만일 선지자였다면"( ), 예수님이 선지자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시몬의 마음속에는, '예수는 선지자가 아니다'는 생각을 가졌다(현실적으로 아니라는 가정법). 만일 예수가 선지자였다면, 이 여자가 누구이며, 죄인임도 알았을 텐데, 그녀가 누군지 알지 못했으니, 예수님은 선지자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의 마음속에 이런 의문을 품고 있을 때, 예수님은 그 생각의 의문을 아시고 말씀하셨다. 40절을 보면, 시몬이 예수님께 질문하지 않았지만, 그 의문에 대답하셨다. 시몬의 의문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대답하신 말씀은, 질문 형식으로 나타났다. "두 사람이 빚을 졌는데, 한 사람은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한 사람은 오십 데나리온을 졌다. 값을 것이 없음으로, 둘 다 탕감해 주었다면, 그 둘 중에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느냐?"(41-42) 시몬은 '많이 탕감을 받은 자'라고 말했다. 그러자 예수님은 '네 말이 옳도다'고 말씀하셨다. 구원은 탕감을 받는 것이지,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많은 은혜를 받은 사람이 감사할 수 있다. 자신의 삶을 깨뜨릴 수 있다. 우리는 예수님을 어떻게 영접하고 있는가? 절대적으로 아니면 상대적으로 어떻게 필요합니까? 그녀는 절대적으로 필요했기에, 구원의 감격과 기쁨이 있고, 헌신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녀는 죄인 된 자신을 알았고, 오직 우리를 구원하실 예수님을 알았기에, 자신의 힘을 다하여, 뜻을 다하여, 목숨을 다하여 주님을 섬기기를 원했다. 그녀는 한 마디로, 주님을 진정 사랑했다. 주님은 이 여인의 사랑을 보았다. 주님을 향한 사랑이 없다면, 그것은 종교의 신념이다. 신앙은 주님을 전인적으로 사랑하는 행위다. 그런데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고, 형식적으로 대하는 시몬주의 신앙인들이 얼마나 많은가? 주님을 사랑하시나요? 내가 죄인임을 깨달을수록, 주님을 사랑할 수 있고, 감사할 수 있다. 47절에 "죄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많은 죄가 사하여졌기에, 하나님을 많이 사랑한다. 시몬이라고 하는 한 바리새인은 예수님을 초대했지만, 예수님께 대한 참사랑의 행위는 없었다. 우리도 예수님을 모셨다고는 하지만, 주님께 대한 찬양도, 감사도 봉사도 없이 살지는 않는가? 인간은 경험한 만큼 그것을 할 수 있다. 사랑은 받아 본 사람만이 할 수 있다. 하나님께 쓰임을 받으려면, 먼저 은혜를 받고 헌신해야 한다. 헌신은 은혜를 받은 사람이 한다. 은혜 받지 않고 헌신하는 사람이 있다면, 은혜를 모르기에 참 어색하고, 자기 자랑만 남는다. 그러나 많은 은혜를 받으면, 본문의 여인처럼 헌신하게 되어 있다. 가짜 신앙인이 되지 말고, 자신의 신앙을 진심으로 검정해 보자. 진짜 주님을 영접한 증거를 가지고 있는가? 주님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칠 수 있는가? 옥합을 깨뜨릴 수 있는가? 감사와 찬양이 살아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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